[사물 시리즈] 지우개

지워도 남는 것들

by dodamgaon

책상 위에 놓인 지우개는 한쪽 모서리가 이미 닳아 있었다.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묻어, 처음의 새하얀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작은 몸은 여전히 묵묵히 종이 위에 기대어 있었다.


연필로 그린 선이 잘못되었을 때, 지우개는 늘 먼저 불려 나왔다.

부드럽게 문질러주면 그림은 희미해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자국은 옅게 남았다.

그 흔적 덕분에 종이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지우개는 언제나 스스로를 깎아가며 종이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점점 작아질수록, 그 안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갔다.


밤이 되자, 책상 위 지우개 가루가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지워진 선들이 은은하게 빛나며 종이 위에서 춤을 추었다.

마치 지워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빛으로 옮겨간 것만 같았다.


아침이 밝자, 종이는 고쳐진 그림을 품고 있었다.

지우개는 더 작아져 있었지만, 그만큼 많은 흔적을 지켜온 셈이었다.




※ 작가의 말

새 지우개로 다시 시작하듯, 우리에게도 언제나 새로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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