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시리즈] 크레파스

부러진 빛으로 그린 무지개

by dodamgaon

상자가 열리자, 굵고 짧은 크레파스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어떤 건 반으로 부러져 있었고, 어떤 건 손때에 묻어 색이 바래 있었다.

겉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빛깔이 숨 쉬고 있었다.


아이의 손이 크레파스를 움켜쥐자, 종이는 금세 물들었다.


색은 곱게 그어지지 않았고, 여기저기 뭉개지고 번졌다.

그러나 거칠고 두터운 선은 오히려 더 선명했다.

종이 위에는 단정한 그림 대신, 마음이 그대로 담긴 흔적이 남았다.

삐뚤빼뚤한 선 속에서 웃음과 바람, 따뜻한 햇살이 함께 피어났다.


밤이 깊자, 아이는 잠들었다.


그 순간, 연필통 속에 남겨진 크레파스들이 깨어나 서로를 부딪쳤다.

부러진 조각들이 맞닿더니, 하나둘 이어졌다.

잘린 빛들이 모여 종이 위로 무지개를 그려 올렸다.

금이 가고 닳아버린 색들이었지만, 모였을 때 더욱 환하게 빛났다.


아침이 밝았다.

책상 위 종이에는 커다란 무지개가 완성돼 있었다.

부러지고 지저분했던 크레파스들 덕분에, 세상은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삐뚤빼뚤하고 부러져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여전히 빛납니다.

크레파스는 완벽하지 않아도, 가장 솔직한 색을 남깁니다.

이전 09화[사물시리즈] 색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