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가 나오질 않았다.
계약직 설움은 크로와상만큼이나 켜켜이..
두 딸을 기르면 공주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아요.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버리고 다리를 얻을 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딸! 절대 남자 때문에 목숨 걸고 그러면 안 돼.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하고 결혼할 수도 있는 거야..”
견우직녀 이야기를 해줄 때는 이렇게 말했어요.
“딸! 1년에 한 번 만나고 이런 거 안 좋은 거야! 기다린다고 다음 해에 견우가 오작교에 나오라는 법 있어? 절대 이렇게 살면 안 돼!”
저는 이게 동심 파괴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극히 현실적인 반전 드라마죠. 제가 딸에게 인생이 동화 같지 않음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제가 겪은 계약직 인생의 설움이 크로와상만큼이나 켜켜이 쌓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영어강사로 일할 땐 월급도 떼어봤고, 월급이 연채 되었다고 전화드렸더니 밥 먹다가 기분 나빴다면서 수저를 던지질 않나. 3개월 무역회사 인턴 시절엔 난 분명히 해외영업부 소속이었는데 정장입고 공장에서 박스 포장을 계속했고요. 대학교 산학협력단 직원일 땐 박사 과정생들이 ‘고등학교는 졸업했어요?’ 이런 말을.. ‘저기요 나 너랑 같은 대학 나왔거든요!!’ 하고 싸우다가 실장님이 저 대신 교수님한테 싹싹 빌기도 했어요. 이 가시밭 같은 인생이여~
내 시간과 내 청춘을 바쳐 일하는 곳에서 언제나 내가 배신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몇 번의 쓰라린 배신을 겪게 되니 계약직 인생에도 철학이 생기더라고요.
‘그래.. 놈이 나를 배신하기 전에 내가 더 잘 되어 박차고 나가자’
이것이 내 직장생활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10년 계약직 인생은 참 험난했어요. 10년 동안 같은 직장에서 계약직으로 있을 법도 한데 저는 버라이어티 하게 직장을 옮겨 다녔답니다.
영어강사 3년도 각 1년씩 3 군데에서 일했고, 이후 3개월 무역회사 인턴, 대학교 산학협력단 직원 1년 1개월, 언어교육원 직원 4년 11개월, 영어회화 전문강사 11개월.. 정말 옮겨도 너무 옮겼습니다. 개구리가 연잎에 점프하듯 이 직장 저 직장을 옮겨 다닐 때에도 플러스로 계속 취업시험 보고 떨어지고를 반복했어요.
10년을 계약직으로 살면서 채용시험에서 계속 떨어지니 정규직에 대한 욕망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씨앗은 처음엔 성냥불마냥 아주 작았어요. ‘그래 열심히 하면 언젠가 정규직이 되겠지..’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하다 20대를 다 보내고 결혼해서 30대가 되었죠. 4년 11개월을 일한 곳에서 ‘정규직 전환의 기회’가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을 때의 그 배신감... 정말 남자에게 배신당한 느낌보다 더했습니다. 마치 내가 버려진 휴지 같은 느낌이랄까..
저는 이런 것이야 말로 배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대하게 했잖아요? 기다리면 정규직 될 줄 알게 해 놓고... 4년 11개월을 기다린 직녀... 제가 바로 직녀인 거죠. 견우가 오작교에 나와야 되는데 4년 11개월 후 뭔가 잘못된 걸 알았다면 얼마나 분통이 터집니까...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32살에 수능을 다시 보기로 결정했어요!
내 두 번째 수능이 나를 환골탈태시킬 것이다! 어마어마한 성적으로 내 인생을 역전시킬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제 두 번째 수능 이야기도 들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