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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프 Oct 06. 2020

그러니까.. 그냥 조금. 내 맘대로 하고 싶었어

#삐뚤어질 테다. 정류장에서 만큼은..  #프롤로그

야. 나 살려고 공부한 X이야.


인스타 덕분에, 15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과 연락이 되었다.  


"언제 교사가 됐데?"

"야. 내가 오죽하면 애 낳고 편입했겠냐. 죽다 살았다. 너야말로 못 알아볼 뻔~ 교포 출인 줄!~~  "

"풉! 뭐래. 나 살려고 공부한 X이야"


그녀는 한국말을 할 때도 농한 영어 발음이 섞인 프로 영어강사가 돼 있었다. 유투이자 책도 출간한 그녀. 대기업에서 굵직한 영어교육 프로젝트도 맡았다는 친구는.. 단지, 살려고 열심히 했단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지. 우리 둘 다 생계형이네."


그렇다. 나는 생계형 인간이다.

근로자로 사는 내내.. 쥐꼬리만 한 월급, 버거운 업무, 야근, 직장 내 왕따. 갑질. 회식.. 매번 산뜻하게도 별로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감과 옹골진 현타가 찾아와도...


'여기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 라며 툭툭 털고 퇴사하거나. 사직서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상사에게 날려버리는 쾌락을 감행할 수 없었다.


이제껏...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팔아 살아오면서.. 사직서는 주머니에도, 업무노트 속에도, 책상 오른쪽 두 번째 서랍쯤에도 없다. 혹여 야근 후, 정말이지 욱하는 마음에 아무데나 사직서를 흘리고 다닐까 봐..

"넣어둬 넣어둬" 하는 심정으로 가슴속에만 꼭꼭 품고 다녔다.


평생.. 로또와 같은 극단적 행운이 벼락처럼 내게 떨어져 퇴사하는 날만 기다려왔건만, 직장에서 눈물 뿌린 세월만 16년이다.


생계형 인간인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침에 눈을 뜨면 근 준비를 .

 

생일보다 손꼽아 기다리는 날은 월급날.

남똘이 성과급을 이체할 때, 부부간의 의리가 연중 가장 치솟으며.

마트에선 원뿔원, 마감 임박 할인 상품에 먼저 손이 가고.

로또와 연금복권은 (아직도) 내 남은 인생의 낙이며.  

혹여.. 호기롭게 명퇴를 신청하는 날은, 대출금을 다 갚는 날일 터이다. 



N잡 + (주식&부동산)까지 잘해야..
살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엄마가 보고 있다며.. 수능만 잘 보면 된다더니..

취업은 더 오싹했고..

죽을 힘을 다해 취직하니..

이제는  직으론 어림도 없단다.

손대면 패가망신할 것 같은 주식은 내적 갈등을 일으켜 못하겠고..

씨드머니는 씨알도 없어 부동산도 남의 떡..

 

끝이 없군..


인생은 항상 나에게.. 무엇인가를 '' 해야 된다고 말해주었다.


더 노력해.

더 참아.

더 가봐.


인생아.. 너의 그 망할 언은 마치..

세상 끝 모서리에 서 있는 기분을 들게 한단다. 너는 모를 거다. 죽을힘을 쥐어짜 달려온 영혼에게.. 조금 더 하라는 그 말이.. 얼마나 고개를 숙이게 하는지... 얼마나 발끝만 바라보게 하는지.. 얼마나 뒤처짐을 확인하게 하는지..


더 참고, 더 노력하고, 더 한발 디디는 순간들이 합쳐져..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조금씩 미뤘더니..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사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였는지..


좋아하는 것이 사라진 삶..
낭비 같아.. 절제한 삶..
죽을 땐.. 조금.. 후회되지 않을까?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류장이 있는 삶.
멋지지 않니?
정기용, 버스정류장


우리는 쉬어갈 권리가 있다.

잠시 이제껏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한숨 돌리는 지점, 정류장은 그 순간이 필요한 시간에 있다.


그곳에선 떡볶이와 오뎅을 먹으며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엉덩이 끝만 벤치에 걸쳐도 쉬어 갈 수 있다. 가끔은 훌륭한 경치를 선사하며 위로를 준다.  


마음의 정류장은 따로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만들어줘야 된다.


가끔은 인생이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있다. 몸이 지쳤다 신호를 보낸다.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되는 순간이 온다면 아마 정류장이 필요한 지점일 테다. 


그땐 잠시 내가 사랑했던 것을 꺼내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고 싶은 곳을 가야 된다. 행복해지는 순간들을 잊어버리지 않게 기억해 내야 할 의무가 있다.


내가 사랑한 것들이 곧 나이고 내가 이루려는 것을 향해 가는 원동력이 될 테니까.


이러니 정류장을 좋아할 수밖에. 떡볶이와 오뎅이면 됐다. 엉덩이 끝만 쉬어가도 좋다. 잠시 쉬며, 생계를 위해 달려가는 내 삶에 위로를 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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