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와상 생활을 시작했다. 3년 내내 준비한 취업에 실패했고 급기야 그 직종을 포기했다. 이불에 누워 웅크리고 있기를 한 달. 햇볕을 못 받아 얼굴은 뽀해졌고, 발가락만 움직여 TV 채널을 돌리는 신공을 펼쳤다. 그간 영어학원강사를 하며 벌어놓은 좁쌀만 한 돈 나부랭이로 이 생활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런지 불안했으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하루 이틀... 그 넘어의 인생을 생각할남은 힘이 없었기에..
백수생활의 묘미는 단짠의 조화 정도일 것이다. 3일에 한번 초코 틴틴과 자갈치를 샀다. 그 덕에 간간히 집 앞 슈퍼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길 건너 도로에그 무엇이 있다 해도 더 이상 걷지 않았을 것이다. 내 직립보행의 한계는 딱 슈퍼까지였다.
후드티를뒤집어쓰고얼굴까지 가려진다 착각이 들면 은둔생활의 유일한 외출을 시도한다. 해를 등지고 들어간 슈퍼에서 검은 봉지와 함께 나오면, 오랜만에 본 햇볕 덕에 눈이 부셔 고개가 툭 떨어졌다. 시선은 저절로 삼디다스 위로 비쭉 솟은 엄지발가락에 꽂힌다. 어쩐지 헐벗은 발가락이 부끄러워져 꼼지락 거리다 보면 벌써 집에 도착해 있다. 3일 만의 외출도 끝이 난 거다. 그땐 비렁뱅이, 놈팽이, 루저, 외톨이, 한심이, 쓰레기, 버러지, 하루살이, 바보, 멍충이와 내가 동의어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잤는지, 졸았는지, 깜박 딴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귀 기울였다. 악기 소리였고 플룻소리였다. 옥상에서 제자리 뛰기만 해도 다른 집에 착지할 수 있는 곳. 고만고만한 집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곳. 싸우는 소리는 물론이고 여름엔 샤워하는 물소리까지 들리는 곳. 그곳이 내가 사는 2층 집이었다. 고로 내가 들은 소리는 플룻 소리가 분명했다.
부스스 일어나서 집에 있는 풀룻을 찾았다.
'어디다 뒀더라?.. '
결혼한 언니가 놓고 간 연습용 플룻. 옷장 위 구석에서 먼지 덮인 플룻 케이스를 찾았다. 열어보니 안 쓰지 오래되어 색깔이 변한 플룻 세토막이 보였다. 쪼그려 앉아..무덤 같은 케이스와그 안에 있는 자고 있는 세 토막난 쇳덩어리를보는데.. 꼭 나 같았다. 그때 머리가 마음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내 마음. 요즘은 어떠니?
나 길을 잃었어. 어디로 가야 할까?
내앞의수많은 길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손을 뻗어 플룻을 꺼내드니 차갑다. 조각난 쇳덩이를 어떻게 조립하는지 알고 싶어 졌다. 소리도 내보고 싶었다. 이리 맞췄다 저리 맞춰보고, 입술에 대고 소리도 내보았다.
'에잇!안되네..'
내팽개쳤다가 다음날 다시 들여다보았다.그러기를 한참..
어쩌다 보니, 취업 스펙을 쌓는데 단 한 줄도 도움이 안 되는 그 악기가.. 갑자기 배우고 싶어 졌다.
한 달만의 외출이었다. 플룻에 있는 보기 흉한 마블링을 지우러 악기사에 갔다. 수리비는 6만원. 이제 초코 틴틴과 자갈치는 없는 거다. 어디서 저렴하게 배울 수 있는지 악기사 사장님께 물어보니 백화점 문화센터가 싸단다.
3달에 7만 원. 합리적인 가격이다. 문화센터에 전화 해보니 중간에는 수강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한 달쯤 기다렸고추운 겨울. 나는 플룻 기초반 수강생이 되었다.
토요일마다 가는 플룻 수업은 귀 고막이 찢어지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10명의 수강생들이 헤드만 쥐고 소리를 내니 시끄럽고 짜증이 났지만 마음엔 활력이 솟았다.
처음으로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했다.
엄마가 시켜서, 성적을 내기 위해, 취업하기위해 배우지 않고.. 아무런 기대 없이내가 좋아서 배운 것. 플룻이 처음이었다.
요즘은 어떠니?
나 이제 생각하려고.
어떻게 살면 좋을지 말이야.
그 후로 10개월쯤 더 문화센터에 다녔다. 플룻이라는 정류장에서 잠시 쉴 수 있었기에 다시 직립 보행하여 외출도 하고 직장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계약직으로 취업하였다.
그렇게 내가 멈춘 곳에 우연히 '플룻'이라는 정류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길을 잃은 곳에 쉬어갈 곳을 만들었다. 힘들 때 돌아가도 좋을 지점을.
15년된 플룻 교본, 4년전 다시 산 플룻
완벽한 하루 완벽한 인생이.. 있을까?
불안전함과 두려움을 품고 살았다.
생계형 인간으로 살며, 남이 찍어주는 불합격 도장에 나도 내 인생을 쓸모없다고 치부했다.
실수하고
자책하고
후회하고
미워하고
나를 나무라고
내 어리석음을 확인하고
더 잘 해내지 못하는 인생을 혼내기만 했다.
그래서 주저앉게 되었고 와생동물이 되어 일어나지 못했다. 순간순간이 소중한 내인생인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있는 그대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에 마주하자..
솔직한 나, 힘들었던 나, 나약한 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생각보다 별일 아니다. 다 지나갈 거야 '라고 불안한 나를 안아주었더니 한 발짝 내딛을 힘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