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해발 4천미터 고지에서 터진 눈물
쿰부 트레킹의 백미는 칼라파타르(5550m)와 고쿄리(5483m)입니다. 칼라파타르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감상할 수 있으며 고쿄리는 아름다운 고쿄 호수와 히말라야 8천 미터 봉우리 네 개를 볼 수 있습니다. 칼라파타르 등정을 끝내고 다음 목적지 고쿄리로 이동합니다.
‘촐라’를 포기하고
고쿄리는 촐라(5330m)를 넘어서 갈 예정이었지만 “폭설 때문에 불가능하며 팡보체로 우회해야합니다.”라는 가이드의 판단으로 포기하였습니다. 촐라는 칼라파타르와 고쿄리의 풍경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여서 꼭 넘고 싶었는데.
우회를 결정하자 마음이 바빠집니다. 트레킹 기간이 이틀 정도 더 소요되어 일정이 촉박하며 고도를 천 미터 이상 내렸다 다시 올려야 하기에 체력 안배도 필요합니다.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계획이 꼬였지만 선택 여지가 없습니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기에 순리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두글라패스(4840m) 바위에 촐라 방향 이정표가 있습니다. 오른쪽 언덕 중턱에 실낱처럼 희미하게 길이 보입니다. 이 길을 선택하면 종라(4830m)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촐라를 넘어 고쿄(4750m)에 갈 수 있습니다. 한참을 쉬면서 바라보지만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팡보체(3930m)로 향합니다.
두글라 롯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국인 두 명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힘들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로부제(4930m)에서 어지러움과 구토로 밤을 지새웠다고 합니다. 일행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하산하지만 마음은 불편해 보입니다. 한 분은 안나푸르나에서도 고소 때문에 중도에서 포기하였다며 아쉬워합니다.
두글라(4620m)를 기점으로 언덕으로 오르면 딩보체(4410m)이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페리체(4270m)입니다. 딩보체에서 일박을 하였기에 페리체로 하산합니다. 페리체는 촐라체와 타보체를 따라 형성된 거대한 협곡 사이에 있으며 하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협곡의 넓은 평원에는 야크를 방목하기 위한 야크카르카(야크 방목장)가 있습니다.
페리체에서 점심을 하였습니다. 식당 유리와 벽에 산악회 깃발, 여행사 스티커, 학술연구회 포스터, 선교 목적의 글귀 등 크고 작은 우리말 흔적이 있습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부착물을 보자 화가 납니다. 고락셉(5160m) 바위에도 한글로 남긴 낙서를 보았었는데. 우리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품격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하는데,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소마레(4040m) 부근에서 우리나라 젊은이 네 명이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가이드와 포터 없이 트레킹을 즐기고 있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고산을 걷고 있는데도 즐거움이 넘칩니다. 서로 다른 색깔의 털모자로 멋을 낸 그들에게 이유를 묻자 “튀어 보이기 위해”서라며 웃습니다. 대학 동창인 이들은 졸업 기념으로 히말라야를 찾았다고 합니다.
엄홍길 휴먼 스쿨
오후가 되자 설산 중턱에서 안개가 피어납니다. 오전에 맑은 하늘이 오후에는 안개가 가득합니다. 산은 바라보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설산 모습은 한 편의 명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로체, 아마다블람, 탐세르쿠, 타보체, 촐라체 등 생소했던 봉우리들이 친한 친구의 이름처럼 정겹습니다. 고은의‘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란 시처럼 볼 때 마다 다른 모습으로 각인됩니다.
팡보체(3930m)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엄홍길 휴먼스쿨’ 간판이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자인 엄홍길은 ‘엄홍길휴먼재단’을 통해 2010년부터 학교 짓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해발 4천 미터에 만들어진 팡보체 학교는 그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학교는 단아한 모습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히말라야 아이들에게 “학교를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싶다.”라는 그의 희망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을은 울창한 향나무 숲을 경계로 하여 위, 아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윗마을은 곰파(사원)를 중심으로 원주민이 살고 있으며 아랫마을에는 히말라야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롯지가 있습니다. 아마다블람을 등정하는 산악인들은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주 일 만에 샤워를
샤워를 하였습니다. 뜨거운 물 한 양동이를 구입하여 샤워장으로 향합니다. 실외 샤워장 지붕은 천막으로 얼기설기 엮여있으며 바닥 곳곳은 얼음입니다. 차가운 바람이 쉴 틈 없이 드나들어 옷을 벗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몸을 씻습니다. 일주 일 만입니다. 고산지대에서는 고소가 올 수 있어 씻을 수가 없습니다.
샤워를 하고 속옷을 갈아 입어니 세상이 맑아옵니다. 해발을 천 미터 이상 내렸기에 컨디션도 최상입니다. 히말라야가 주는 교훈 중 하나는 사소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먹고, 자고, 씻고’하는 일상이 이곳에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양동이의 뜨거운 물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곳이 히말라야입니다.
토속주인 뚱바 한 잔을 마시자 몸에 열기가 돌며 따스해집니다. 침낭과 모포로 몸을 감싸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봅니다. 날이 흐려지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설산은 자취를 감추었고 룽다와 타르초만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담은 오색 깃발은 바람을 따라 세상 사람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허술한 창문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며 불경을 전하지만 우매한 저는 깨닫지 못합니다.
넋이 나간 모습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트레킹에서 눈 내리는 모습은 처음입니다. 날은 점점 사위어지고 바람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스산한 겨울바람에 눈과 다섯 가지 색체가 조화를 이루며 흩날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눈물샘이 터졌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해발 사천 미터 고지에서 50대 중년이 혼자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었습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계속 눈이 내려 이곳에 몸과 마음이 고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