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년 만에 다시 찾은 안나푸르나
매년 겨울 여행을 하지만, 식구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히말라야를 걷는 것보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기적인 가장을 둔 식구들은 매번 가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마지못해 승복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트레킹 준비는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야반도주하듯 하였습니다.
여행의 무게, 배낭의 무게
여행의 즐거움은 배낭 무게와 반비례합니다. 준비할 때는 필요할 것 같지만 여행이 끝나면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짐만 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번번이 내게 속으면서도 짐의 무게는 줄지 않습니다. 언제나 되어서야 작은 배낭 하나로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트레킹 장비와 네팔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니 설산 풍경이 펼쳐집니다.
떠난다는 것은 돌아올 곳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 달간, 짧은 여행이지만 가정, 직장, 동료 모두와 이별하고 여행할 수 있는 것은 돌아올 안식처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여행이란 집을 떠나 집을 그리워하는 것 아닐까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 트레킹
네팔에는 대표적인 3대 트레킹 코스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에베레스트라고 알고 있는 “쿰부 히말라야”, 네팔에서 가장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랑탕” 그리고 풍요의 여신으로 트레커들이 가장 좋아하는 “안나푸르나”가 있습니다.
안나푸르나를 트레커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트레킹 코스가 대체로 고도가 낮아 고도에 따른 부담이 적기 때문입니다. 또한 3~30일까지 다양한 트레킹 코스가 있어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입니다. 풍요의 상징인 다랑논 정경과 황량한 티베트 풍경 그리고 안나푸르나군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올해는 안나푸르나의 많은 트레킹 코스 중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푼힐 전망대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일명 ABC)에 갑니다. 이번 트레킹은 다섯 명이 함께합니다. 올 2월 정년 하시는 선배 부부와 대학 동문 두 분이 함께 하기에 안전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하였습니다.
저는 트레킹을 통해 일탈을 꿈꿉니다. 세상을 정형화된 방법으로만 산다면 세상은 무미건조한 곳이 되고 말겠지요. 무엇이 되었든 틀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삶은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달간, 일터와 가족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번 트레킹의 화두는 “단순하게”입니다. “먹고, 자고, 걷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젯밤 지인들에게 세모 및 새해 인사를 전하고 스마트폰 전원을 내렸습니다. 전원을 내리는 순간 세상은 저와 단절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저와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행이기에 낯선 곳에서 저 자신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여행자 보험도 가입할 수 없는 곳
공항에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고자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고위험 군에 속하기에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고 합니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위험하지도, 목숨을 잃을 염려도 없는 곳인데도 말입니다. 신의 나라에 대한 보험은 세상 보험으로는 해결할 수 없나 봅니다. 저는 히말라야 신들의 보험에 가입합니다. 이 보험은 보험료 대신 겸손한 마음을 요구하기에 무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게 산을 걸을 생각입니다.
항공기 모니터에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Eat, Pray, Love”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인생에 한 번쯤은 용기가 필요하다?”
“딱 일 년! 신나게 먹고, 뜨겁게 기도하고, 자유롭게 사랑하라!”
안정적인 직장, 번듯한 남편,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언젠가부터 이게 정말 자신이 원했던 삶인지 의문이 생긴 서른한 살의 저널리스트 ‘리즈’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일, 가족, 사랑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일 년 동안 여행을 떠납니다. 이탈리아에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동안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태국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카오산으로 향합니다. 카오산은 방콕의 여행자 거리입니다. 제가 처음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년 전입니다. 그 후, 수없이 이곳을 들락거렸습니다. 네팔이나 동남아 여행의 출발지로 또 종착지로 이곳을 찾았으니 횟수를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하겠지요.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이곳을 떠났고 또 돌아왔습니다. 왠지 모를 마음 편안함을 주는 곳이 카오산입니다.
배낭여행자의 천국 ‘카오산 로드’
카오산은 현지인보다 더 많은 배낭여행자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여행자들은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앞뒤로 메고 활보하며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나 여행사를 찾습니다. 노천카페에서 맥주 한 병만 가지고도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으며 레게 머리를 하고 타투 문신을 하여도 부담되지 않는 곳, 무엇을 하여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넉넉한 곳이 카오산입니다.
더구나 이곳의 물가는 무척 저렴합니다. 몇 년 전 이곳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가 생각납니다.
“이곳이 좋은 이유가 무엇이야?”
“싸기 때문이지”
뭔가 동양의 매력이나 자연환경에 대한 경이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한 제 기대와는 달리 ‘싸다’라는 대답에 실망하였지만 다시 생각하니 ‘싸다’라는 단어에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싸다’라는 것은 개발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순수가 남아 있음을 의미하니까요.
카오산 로드는 배낭여행자의 성지이자 천국입니다.
카오산의 열기는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은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창문을 넘어 들어와 저를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몇 번을 뒤척이다 깨어 시계를 보니 아침 8시입니다.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허겁지겁 옷을 입고 카운터에 가서 체크아웃을 하려 하니 종업원이 웃으며 시계를 가리킵니다. 새벽 1시 30분입니다. 제가 시계를 거꾸로 본 것입니다. 다시 숙소에 올라와 짐을 풀고 침대에 누우니 웃음만 나옵니다.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무언의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