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싫어하는, 기억에 남는, 잊을 수 없는 모든 숫자
숫자로 새겨진 시간
1982년 3월 10일,
엄마의 첫 출산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
엄마에게 그날의 시간을 물어보면, "아빠가 퇴근할 때쯤,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이었지, 그때 병원으로 갔어."라는 흐릿한 대답만 돌아온다. 번듯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데도, 정확한 출생 시간은 알 수 없다. 그 시절엔 태어난 그 자체가 기적이었고, 시와 분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시간은 해의 기울기로 측정되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그 경계의 순간, 하루가 밤으로 넘어가는 그 무렵.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내 탄생은 숫자가 아닌 감정의 무게로 남아있다.
그 시절의 임신과 출산은 지금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산부인과보다는 집에서의 출산이 더 잦은 시절, 내 동생도 외할머니의 집에서 세상에 나왔다. 할머니의 손길과 이웃들의 기도 속에서. 그래서 동생도 태어난 시간은 모른다. 다만 새벽녘 닭이 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은 다르다. 임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산부인과를 간다.
병원은 날짜와 숫자로 임신을 기록한다. 마지막 생리일로 임신 주수를 계산하고, 출산 예정일을 분 단위까지 예측해 알려준다. 일주일, 이주일 간격으로 병원을 오가며 아이의 성장을 숫자로 확인한다. 머리둘레 몇 센티미터, 몸무게 몇 그램. 초음파로 본 작은 심장이 분당 몇 번 뛰는지조차도 의사가 정확한 숫자로 설명해 준다.
내 딸이 태어난 날, 나는 엄마와 달리 그 시간을 분 단위까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예정일보다 조금 빠른 2013년 11월 10일 새벽 4시 21분 병원 팔찌에는 태어난 시각이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었고, 첫 사진, 발 도장, 탯줄 도장, 손발 모형까지 세심하게 남겼다. 키 50센티미터, 몸무게 3.6킬로그램. 머리둘레 34센티미터, 숫자는 기록으로 남았고, 기록은 곧 기억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정확한 숫자들 사이로, 때때로 엄마의 흐릿한 기억이 더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이었지"라는 말속에는 하루의 끝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맞닿은 그 신비로운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엄마 세대의 출산은 "생명의 탄생"이라는 거대한 사건이었고, 내 세대의 출산은 "숫자로 관리되고 기록된 탄생"이었다. 하지만 결국 같은 것이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첫 숨을 쉬기 시작한다는 것은.
주민등록번호라는 13자리 숫자를 부여받는 순간,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의 딸이 되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엄마가 되며, 이 나라의 한 국민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숫자는 우리를 분류하고 구분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의 삶은 숫자와 숫자 사이, 기록과 기록 사이를 흐르는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정확한 시각으로 시작된 내 딸의 인생도, 언젠가는 "그때쯤"이라는 따뜻한 기억의 언어로 다시 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