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배구는 코트에 6명이 있다고!

by 와루


20210401씀


배구를 소재로 한 만화 「하이큐」에서는 오이카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작중 오이카와는 어린 시절, 천재의 압박에 괴로워했다.

위로는 라이벌 팀의 천재 왼손 강스파이커에게 짓눌리며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수모를

아래로는 저보다 2살 어린, 같은 팀 천재 세터에게 주전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이 모든 것이 제 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일이라 자책했다.

그 자책은 하루하루 오이카와를 갉아먹었다.


제 실력을 키워야만 팀이 이기고 주전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 스스로만 잘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컨디션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는 채 연습에만 매진했고

그 결과는 연습경기에서의 실수를 낳을 뿐이었다.


나는 잘해서 우시지마를 이기고 싶은데,

나는 잘해서 카게야마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나는 잘해서 전국대회에 진출하고 싶은데,

하지만 아무리 잘해봤자 천재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오이카와는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배구는 코트에 6명이 있다고!”


이성을 잃은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가 한 말이다.

이 일침 하나로 오이카와는 다시 배구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이카와는 배구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배구는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이라는 것.

나 혼자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팀이 이기는 경기라는 것.


그렇다, 배구는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파워풀한 스파이커의 공격이 있어도

감각적인 세터의 토스가 있어도

장신 미들블로커의 블로킹이 있어도

모든 공을 다 올려버리는 리베로가 있어도

그들이 팀을 이루지 못하면 배구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코트에 있는 6명과 코트 밖에 있는 수많은 선수, 코칭스태프들이 모두 한 팀을 이뤄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20-21 시즌 gs칼텍스는 여자 배구 사상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할 수 있었고

주전 세터와 스파이커가 모두 사라진 흥국생명도 챔프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모두 팀이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올 시즌 여자 배구는 김연경의 복귀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래 없는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배구리그가 열리는 곳이 몇 없었고

올림픽을 앞두고 경기감각을 유지하기 원했던 김연경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9년 한국리그를 떠난 이후 10년 넘게 해외 리그를 제패하며 세계 최고의 배구선수로 군림해온 김연경의 복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김연경의 소속팀인 흥국생명의 우승을 점쳤다.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며 올 시즌은 당연히 흥국생명의 시즌일 거라 예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연경의 합류로 인해 흥국생명은 외국인 선수를 두 명 보유한 것과 마찬가지의 전력을 가지게 되었을 뿐더러 국가대표 쌍둥이 자매 이재영, 이다영을 둘 다 fa로 잡게 되면서 어느 팀보다도 막강한 능력치를 갖춘 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보컵도, 정규리그도, 챔프전도 우승을 차지한 것은 gs칼텍스였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스파이커가 있다 하더라도 그 선수 혼자서 30게임 내내 스파이크를 내려 칠 수도, 점수를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빗맞아서 라인을 벗어날 수도, 잘 맞더라도 블로킹에 막힐 수도 있는 법이고, 또 너무 많이 때린 탓에 힘이 빠져 버릴 수도 있다.

공격수도 사람인지라 적절히 쉬어주며 몸을 혹사하지 않아야만 30게임 내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적절히 쉬어주며 몸을 혹사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분배이다.

gs칼텍스는 그 점에서 흥국생명보다 우위를 점했다.

러츠-강소휘-이소영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를 중심으로 적확한 분배를 만들었고, 그 덕에 선수들은 무리없이 한 시즌을 임할 수 있었다.


확실한 삼각편대의 구축은 경기 상황에 맞게, 또 각 선수의 상태에 맞춰 경기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는 곧 다양한 승리방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선수에 의존하는 몰빵배구는 그 선수만 잡으면 경기 진행이 어려워지지만

안정적인 삼각편대가 구축된 팀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공격이 폭발할 수 있어 공격의 루트가 막히더라도 충분히 새로운 길을 뚫을 수 있다.

경기 내내 다양한 방식으로 득점을 내는 것은 상대를 지치게 만들고, 지친 상대를 공략하는 것은 더욱 수월하므로 승리에 더욱 가까워진다.

이렇듯 gs칼텍스는 삼각편대의 구축을 통해서 선수의 경기력 유지와 다양한 공격 루트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삼각편대만으로 gs칼텍스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gs칼텍스가 삼각편대로 확실한 공격력을 갖추었고, 그로 인해 우수한 득점력을 갖춘 것도 맞지만

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면 절대 우승까지는 갈 수 없었을 것이다.


gs칼텍스의 팀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준 날이 있었다.

2월 5일, gs칼텍스는 흥국생명과의 경기를 셧아웃으로 이겼다.

해당 경기에서 김유리는 9득점, 공격 성공률 64%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처음으로 팡팡 플레이어에 선정되어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2010년 데뷔 후 은퇴, 복귀 등 우여곡절의 시간을 견디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 온 김유리의 인터뷰에

감독을 포함한 모든 선수, 코칭스태프들이 모두 모여 그의 인터뷰를 지켜보았다.

김유리가 눈물을 보이면 같이 눈물을 흘려주고, 미소를 지으면 같이 웃어주는 팀 동료들은 따스한 눈빛을 보내며 한마음 한뜻으로 김유리를 응원해주었다.

진정한 원팀의 모습이었다.


하나를 이룬 gs칼텍스는 원팀으로서의 강력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주춤하던 흥국생명을 누르고 끝내 우승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사상 최초로 트레블의 위업을 달성하며 한국배구의 최고의 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흥국생명은 원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승하지 못한 것일까.


그것 역시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오히려 흥국생명은 원팀이 되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챔프전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20-21시즌,

모두가 흥국생명의 우승을 장담했지만 흥국생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된 시즌을 보냈다.


개막 이후 10연승을 질주하던 흥국생명은 3라운드 즈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선수의 개인sns에서 비롯된 팀 내 불화설에, 외국인 선수의 부상 이탈까지 발생했다.

결정적인 것은 학교폭력 고발.

흥국생명은 이로 인해 주포와 주전세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자칫하면 팀이 붕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짐을 모두 김연경이 떠안았다.

팀의 주장으로서, 핵심 공격수로서 김연경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매 경기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새로운 세터 김다솔과 경기마다 새롭게 호흡을 맞춰야만 했고 외국인 선수의 공백까지 혼자 메워야 했다.

모든 전력을 재정비해야 하는 상황에 김연경 혼자 흥국생명을 짊어지었다.


새롭게 정비한 흥국생명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주전 경험이 별로 없는 선수로 구성된 탓에 경기력이 훌륭하지도 않고 호흡이 척척 맞는 것도 아니었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

김연경이 중심이 되어 팀을 이끌고, 어린 선수들은 그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새롭게 팀분위기를 맞추어 팀이 더 이상은 무너지지 않도록 최선의 파이팅을 내었다.

그 결과 정규리그를 2위로 마감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흥국생명 붕괴 이후, 많은 사람들은 플레이오프에서 흥국생명이 승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말했다.

이미 망가진 팀, 아무리 이어붙이고 꿰매어도 다시 한 팀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정상급 활약을 할 선수는 변함없이 김연경 뿐이었다.

그래도 코트에는 6명이 있으니까.

새로운 한 팀으로 정비한 흥국생명은 6명이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흥국생명은 플레이오프에서 2:1로 기업은행을 잡고 챔프전에 올랐다.

하지만 원팀이 된 시간이 gs칼텍스에 비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에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비록 준우승이지만 흥국생명 선수단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시즌을 잘 끝마친 것만으로도 마땅한 응원과 박수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선수단만!/프런트 말고 선수단만)


20-21 시즌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시즌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달라고 소원할 만큼 사건사고가 많은 시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배구의 핵심을 다시 한 번 깨우칠 수 있었다.

6명이 있는 코트에서 누구 하나만 잘해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반대로 부족한 능력을 하나 된 6명의 노력으로 메울 수 있다는,

6명이 한 팀을 이뤄야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배구의 참의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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