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3씀
야구팬이라면 모름지기 코인 매수는 선택을 넘어 필수가 아닐까.
나만 해도 기아타이거즈에서만 매수한 코인이 다섯 명은 넘는다. 오 이런.
내가 매수한 생애 첫 코인은 한승혁코인이었다. 피지컬과 강속구에 낚였달까. 여기서 낚였다는 것은 한승혁의 퍼포먼스에 속았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듯 제대로 꿰였다는 말이다. (아, 두 개가 결국 같은 말인가.) 딴딴한 하드웨어에 160 가까운 강속구를 뿌리는 초 고교급 투수. 이 매력적인 코인을 안 사고 배기겠냐고. 드래프트 지명되자마자 바로 매수했다. 그렇게 나의 지독한 한승혁코인 염불 인생이 시작되었다.
한국 파이어볼러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바로 제구이다. 볼의 위력은 검증되었으니 이제는 그 무기를 원하는 곳에 찔러 넣어 타자를 공략하기만 하면 되는데, 하다못해 복판에 찔러 넣기만 해도 구위로 압도할 수 있는데, 다들 그걸 못해서 큰 부침을 겪는다. 한승혁도 마찬가지였다. 볼만 빨랐지 스트라이크를 집어넣지 못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다는 건 카운트 싸움이 안 된다는 거다. 이는 결국 상대 타자들이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고 기다리기만 해도 1루로 출루할 수 있다는 뜻이고, 혹은 불리해진 카운트를 돌리기 위해 억지로 밀어 넣는 스트라이크를 타자들이 예측하고 쉽게 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스트라이크를 넣지 못하는 강속구는 한승혁의 무기가 아닌 한승혁을 공략할 수 있는 무기가 되어버렸다.
제발 제구만, 제구만 잡자, 제발 스트라이크 좀 던져, 제발 볼 좀 그만, 제발, 제발, 한승혁 등판 때마다 외던 염불은 제구가 다였다. 정말 제구만 잡으면 떡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떡상하면 코인이 아니지. 불같은 강속구를 바탕으로 구원투수 역할을 하던 한승혁은 불안한 제구로 인해 팀을 안정적으로 구원하지 못했다. 남발하는 사사구에 언제나 위기를 맞았다. 그만큼 멘탈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멘탈에 제구는 당연히 잡히지 않았고 그럼 또다시 위기는 찾아왔다.
구원투수에서 선발투수로 보직을 변경하며 마음의 부담을 좀 덜었는지 조금은 나아지나 싶었는데, 망할 부상이 갈 길 바쁜 한승혁의 발목을 잡아챘다. 18시즌 기복에도 불구하고, 없는 살림에 선발 한 축을 담당했던 덕인지 19시즌에도 선발로 낙점이 되었는데. 망할 내전근 부상 때문에 시즌을 치르지도 못했다. 재활에 매달려도 시즌 중 복귀가 어려워지면서 한승혁은 군 복무를 결정했고 결국 군 보류 선수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한승혁은 끝이 연결된 원과 같은 궤도를 거닐기만 할 뿐 큰 성장세는 보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18시즌의 기복에 홀려 난 또다시 한승혁코인을 풀매수 했다. 기복이 심한데 왜 매수하냐고? 기복이란 것이 생겼으니까. 그전까진 기복이랄 것도 없이 한결같이 못했다. 긁히는 날은 거의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고 등판할 때마다 사사구의 연속이었다. 그랬던 선수가 퐁당퐁당을 시작하니 ‘퐁’에 자꾸 눈길이 갔다. 데뷔 초만 하더라도 존 한가운데에 폭탄이라도 있는 것처럼 전력으로 빠지는 피칭을 하더니만 이제서야 조금씩 승부를 하는 것 같은 피칭을 보였다. 그래, 이 정도면 아직 가능성이 있어. 이렇게 계속 선발 기회를 잡고 게임에 나가는 날이 많아지면 기복도 줄어들겠지. 이제나 좀 빛을 보나 싶었는데. 그런 찰나에 맞은 부상과 그로 인한 군 복무에 적잖이 아쉬웠다.
코인을 매수했기 때문이었는지 한승혁의 군 복무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이미 1년쯤 지난 것 같았는데 이제 반년이 지났고, 제대하는 선수들과 같이 입대했던 거 같은데 여전히 반년이 남았고, 3년이 훌쩍 넘은 거 같은데 아직도 한 달이 남았고.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승혁의 복귀 소식이 드디어 올해 6월에 들려왔다. 복귀 소식만큼 반가웠던 건 더 이상은 아프지 않다는 말. 아프지 않은 한슝쾅, 아니 한승혁은 얼마나 좋은 피칭을 할까. 심장이 발랑발랑했다.
상무에서 경기를 계속해왔던 것도 아니고 부상이 있었던 만큼 더욱 착실한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승혁의 올 시즌 복귀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본인 역시 지금 온 만큼 바로 올라갈 수는 없으니 치분하게 준비하며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지똥개같은 감독 코치들의 팀 운영으로 인해 그지똥개가 되어버린 팀 사정상 한승혁은 9월에 바로 1군 합류를 했고 경기까지 뛰었다. 아직도 볼질하면 어떡하지, 구속이 떨어지진 않았을까, 제발 안 아파야 할 텐데, 또 심장이 발랑거렸다.
정말 다행히도 한승혁의 컨디션은 괜찮아 보였다. 공 10개로 이닝을 삭제한 복귀 두 번째 경기에서 한승혁은 바깥쪽 완벽히 제구 되는 150직구에 타이밍을 뺏는 정확한 제구의 변화구를 곁들이며 루킹 삼진을 엮어냈다. 여전히 150이 넘나드는 직구를 던질 수 있다는 점과 그 볼을 이제는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점에 콧볼이 씰룩거렸다. 세 번째 경기에서도 위기는 있었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고 이닝을 정리했다. 이번에는 입가가 드릉드릉했다.
존버가 승리하는 이유는 승리할 때까지 존버하기 때문이다. 야구판의 코인 매수자들은 존버가 일상이다. 오래토록 눈여겨보던 선수가 떡상하는 기쁨은 그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짜릿함이 있기 때문이다. 야빠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일주일에 6경기를 챙겨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언제 터질지도 모를 이 코인들을 끌어안고 그저 언젠가는 터지겠지, 터지겠지, 하며 간절하게 기도한다. 선수의 활약이 빛나기 시작하면 “어, 이놈 이제 진짜 터지는 거냐아아아아!” 하며 흥분해 마지않는다. 오래 전 사 놓은 유니폼을 다시 꺼내 입고, “이 놈 내가 터진다고 했잖아아아아아아아!!!!!” 하며 울부짖는다. 물론 그게 단 며칠의 반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 격언은 코인 매수에 있어 절대적인 의지가 된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희망차게 견디게 해줄 한 방울의 마법 약 같은 거다. 이제나저제나 도대체 이놈은 언제 터지나 한숨이 나오다가도 야구는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라는 생각에 다시 간절하게 바란다. 제발 2할 8푼만 때리게 해주세요. 제발 영점만 잡게 해주세요. 제발 아프지만 않게 해주세요.
한승혁코인. 장장 10년을 묻어두었다. 존버가 일상인 야빠에게 기다림만큼 습관처럼 몸에 밴 것도 없으니까. 지난날 150의 폭죽을 뿌렸대도 상관없다. 이제는 제구 되는 150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으니까. 선수 본인이 끝을 선언하는 그날까지 끝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한승혁코인 떡상,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