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만큼 값진 1승

by 와루


20220429씀


기아타이거즈의 개막전 선발 투수는 양현종이었다. 팀에서 제일 강력한, 가장 믿음이 가는 투수에게 주어지는 1선발의 자리. 그 자리에 선 양현종은 자책점 없이 6이닝을 소화하며 믿음에 부응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승리투수가 되진 못했다. 자책점은 없었지만 수비 실책으로 인한 실점이 무려 4실점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타자들은 4점의 격차를 줄이지 못했고, 불펜 투수들은 그 격차를 더 벌렸다. 최종 9-0의 스코어로 경기를 패하며 양현종은 잘 던지고도 패전투수의 멍에를 써야만 했다.


어쩌면 개막전은 복선이었을지 모른다.


개막전 이후로 양현종은 못 던진 날이 없었다. 나오는 경기마다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며 1선발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럼에도 승리투수가 되진 못했다. 6이닝 무실점을 하면 타자들이 단 1점도 만들지 못해 노디시전이 되고, 6이닝 3실점을 하면 타자들은 2득점을 만들면서 패전을 안겼다. 심지어 7이닝 1실점을 하고 승리투수 요건을 챙기고 내려가면 야수들이 그 뒤로 실책을 줄지어 하면서 기어이 승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타격의 화끈한 지원도, 안정적인 수비의 백업도 받지 못한 양현종은 마운드에서 언제나 외로워 보였다. 26일 경기도 그러는 줄만 알았다.


양현종은 시작부터 고전했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인지, 너무 완벽한 피칭을 바랐던 탓인지 제구가 조금씩 흔들렸다. 상대는 침착했다. 존에서 빠지는 공은 묵묵히 지켜봤고 맘에 들지 않는 공은 연신 커트해냈다. 스트라이크 비율이 떨어졌고 두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었다. 투구 수가 쭉쭉 늘어났다. 빠른 카운트를 잡기 위해 스트라이크를 던지자 상대는 곧장 받아치며 점수를 만들었다. 새로 온 포수와 야수의 합에서도 미스가 났다. 2사 1, 3루 상황에서 더블 스틸을 알아차린 포수가 주자를 잡기 위해 2루로 송구했지만 2루수가 이를 받지 못하면서 3루 주자는 홈에 들어왔고 1루 주자는 3루까지 진루하고 말았다. 계속된 위기에 안타까지 맞으며 또다시 실점을 했다. 그렇게 양현종은 1회에만 42개의 공을 던지며 3실점을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양현종은 무너지지 않았다. 1회에만 42개를 투구했으니까 오랜 이닝을 끄는 건 어렵지 않을까,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양현종은 투구 수를 줄여나갔다. 2회 9구, 3회 14구, 4회 8구, 5회 9구로 4이닝 합쳐서 지난 1회보다도 적은 투구 수를 기록하며 빠르게 아웃카운트를 잡아나갔다.


아쉽지만 승리투수가 되긴 글러버린 것만 같았다. 일요일 경기에서 폭발적인 화력으로 14점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이는 기적과도 같은, 그러니까 두 번 다신 없을 로또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양현종의 등판 날이면 맥을 못 추는 타선은 전통과도 같아서 타선의 지원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 예상은 4회까지 빗나가지 않았다. 병살타가 3개면 그날 경기는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찬스가 만들어져도 그때마다 뚝뚝 끊어버린다면 팀에겐 승리의 흐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날 기아는 무려 4회까지 3번의 병살타를 쳤다. 경기 초반 매 이닝 찬스를 만들었지만 그 찬스를 단 한 번도 득점으로 연결 짓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기긴 어려워 보였다.


5회에 또다시 찬스가 찾아왔다. 트레이드로 온 박동원의 첫 안타 이후 김석환의 볼넷으로 1사 1, 2루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타석에 들어선 김도영의 타구가 3루수에게 굴러가며 또 병살인가, 한숨이 나왔지만 역시 김도영의 발은 빨랐다. 아웃카운트는 하나 늘었지만 그래도 김도영의 발 덕분에 찬스를 이어갈 수 있었다. 최근 가장 감이 좋은 류지혁은 그 찬스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안타를 쳐서 2사 만루의 상황을 만들었다. 한숨이 나왔다.


만루, 모든 루가 꽉 차있는 상황에 긴장은 보통 수비하는 쪽이 하기 마련이다. 짧은 안타에도 실점을 할 수가 있고, 큰 것 한방이면 한 번에 4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긴장에 못 이겨 볼넷이라도 내준다면 안타 없이도 실점을 하게 된다. 여러모로 수비의 입장에서 만루는 골치 아픈 상황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올 시즌 기아라면 조금은 만만해 보이기도 한다. 만루만 되면 타자들이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듯이 고장나버린다. 죄다 땅볼만 때려서 어떤 타자가 나오든 점수를 못 낸다. 볼을 골라내지도 않는다. 무슨 생각인지 초구에 냅다 휘두르는데 그 결과는 절대 좋지 못하다.


2사 만루, 타석에는 전 타석에서 병살타를 친 김선빈이었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손이 발발발 떨렸다. 김선빈은 여지없이 초구에 방망이를 돌렸다. 이렇게 또 찬스가 날아가는구나.


아니 근데 이게 웬일인가. 타구가 우중간을 완전히 완전히 갈라버렸다. 3루, 2루 주자에 이어 1루 주자까지 홈에 들어오는 싹쓸이 2루타. 올 시즌 처음 보는 만루 싹쓸이였다. 단숨에 동점을 만들어버리는 김선빈의 적시타. 그래, 이게 바로 만루 찬스지. 속이 뻥 뚫리는 김선빈의 장타에 적어도 패전은 면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시름이 놓였다.


6회에도 올라온 양현종은 공 10개만을 던지며 또 한 번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 6회를 던지는 동안 1700 탈삼진까지 기록하며 kbo 역사에 이름도 새겨 넣었다. 하지만 스코어는 3-3이었기에 승리투수가 되긴 어려웠다.


그리고 맞은 7회. 선두타자 김석환이 타석에 들어섰다. 큰 기대는 없었다.


김석환은 팀에서 꼽은 유망주다. 지금 당장 3할 타율을 기록하고 홈런을 20개씩 치는 걸 바라는 게 아닌, 시간을 길게 보고 성장시켜 나가야 할 선수. 달리 말하면 지금 당장은 부족함이 있는 선수다. 게다가 상대 투수는 변화구를 기깔나게 던지는 투수였다. 이제 막 1군에 적응해가고 있는 유망주에겐 아무래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변화구 대처란 결국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상대는 역시나 집요하게 변화구로 김석환을 공략했다. 단 한 번의 직구도 던지지 않고 오로지 슬라이더와 포크볼로만 상대했다. 그런데 김석환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변화구에 속아 더그아웃에 들어갔을 텐데. 타석에서 침착하게 볼을 골라내는 김석환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받은 6구는 떨어지지 않고 밋밋하게 들어왔다. 김석환은 망설임 없이 방망이를 돌렸다. 호쾌한 스윙에 맞춰 들리는 깨끗한 타격음.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거포 유망주의 시즌 첫 홈런이라는 것을 말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터진 시즌 마수걸이 홈런. 관중석은 들끓었고, 더그아웃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선발 투수였던 양현종은 더욱 크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단 1점이었지만 든든한 지원을 받은 양현종은 7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이미 승리투수 요건은 채웠지만 그래도 이닝의 2개의 아웃카운트를 더 잡아내며 100구에 가까운 공을 던지고는 내려갔다. 어렵게 풀어나간 1회에도 불구하고 6.2이닝을 3실점으로 버틴 양현종을 향해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양현종은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이며 이에 화답했다.


타선은 그 이후로 더 폭발하며 점수 차를 확실히 벌렸다. 8회 만루 찬스에 등장한 박정우를 보며 어떤 야알못은 이 상황에 대타가 없냐고 한탄했지만, 박정우는 그 야알못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견수 앞 안타를 치며 주자 2명을 불러들였다. 역시 기록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박정우는 통산 만루 타율이 2타수 2안타 즉, 10할일 만큼 만루에 강한 선수였는데 어떤 야얄못이 데이터도 모르는 주제에 깝치는 바람에 대 박정우 선생님의 명예에 흠집을 낼 뻔했다. 안타를 치고 주먹을 내지르며 환호하는 박정우를 보면서 그 어떤 야알못은 결국 대가리를 박고 사죄했다고 한다. 타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류지혁의 2타점 적시타와 이적생 박동원의 타이거즈 소속 첫 홈런까지 터지면서 10득점에 이르렀고 큰 점수 차로 이길 수 있었다.


참 힘든 첫 승이었다. 잘 던지고도 챙기지 못하는 승수에 분명 답답했을 테다. 게다가 본인이 등판하는 날이면 꼬박꼬박 팀이 패배하니 심적 부담은 더했을 테다. 그럼에도 에이스는 힘든 내색 한 번을 한 적이 없다. 그 역시 자기 몫이라도 되는 듯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 노고에 드디어 타선이 응답을 한 것이다. 그렇게 얻은 귀한 첫 승이기에 더욱 값지다.


개막전이 에이스의 첫 승까지 가는 길의 복선이었다면, 이번 첫 승은 앞으로 100경기 넘게 남은 게임의 복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디 야구란 미신과 기도가 만들어내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갸빠가 그렇게 믿으면 이뤄질 것이다. 초반에 흔들려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펼치기를, 그래서 에이스의 승리가 더 이상은 힘들고 어렵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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