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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에서 비롯된 낭만, 바로잡으니 더 낭만스럽다

by 와루


20211212씀


유튜브를 통해 윤하의 라이브 영상을 보았다.


윤하는 서부 총잡이처럼 본새나는 부츠를 신고선 총 대신 기타를 차고 속사포로 노래를 쏘았다. 와, 너무 멋있어. 완전히 반해버렸다. 심지어 곡도 좋았다. 컨트리풍의 당찬 멜로디에 당장이라도 하늘을 찌를 것만 같은 고음을 부르면서 윤하는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단단함은 가사에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두 눈 앞의 끝, 사뿐 넘어가
한계 밖의 trip, 짜릿하잖아
녹이 슨 심장에 쉼 없이 피는 꿈
무모하대도 믿어 난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두 눈앞에 당장 보이는 한계를 사뿐히 뛰어넘겠다고? 무모한 걸 알면서도 녹이 슬어버린 심장에 피어버린 꿈을 믿고 가겠다고? 너무 낭만적이잖아. 오랜만에 만난 취향저격 멜로디와 스토리 짱짱한 가사에 기절할 것 같았다. 심지어 제목까지 낭만스러웠다.


요구르트구름이라니.


옅은 주황빛의 구름이 그려진다. 겁 없이 뛰어들면 새큼한 향에 한 번, 달콤한 맛에 한 번 반해버릴 것만 같은 구름.


용사는 요구르트구름을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난다. 어른이 된 탓에 심장은 녹슬어버렸지만 그 속에서도 요구르트구름을 찾기 위한 꿈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요구르트구름을 쟁취하는 길이 무모한 걸 알면서도 그 짜릿함을 알기에 나아간다. 길이 끝나 보여도 그게 나의 끝은 아니니까. 다치고 망가져도 괜찮다. 지쳐서 느려져도 상관없다. 멈추지 않을 테니 이 항해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울타리 밖에서 일렁이는 요구르트구름을 만날 거라는 믿음 하나로 용사는 달리고 또 날아오른다.


윤하는 천재다. 이렇게 판타지스러운 서사를 3분 26초에 알차게도 담았다. 눈을 감은 채로 4분도 안 되는 시간을 투자하면 멋진 용사의 모험기 한 편이 뚝딱 그려진다. 제목이 요구르트구름이라서 그런지 듣는 내내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거칠고 투박한 상처투성이의 용사가 달콤한 요구르트구름을 찾으려고 모험을 떠나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 낭만적이다. 윤하는 천재다.


요구르트구름을 찾아 떠나는 용사에 한참 취해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댓글을 보았는데 좀 의문이었다.


탄소중립 가수? 우주 원주민 가수? 보이저 호가 어쩌고 우주가 어쩌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게다가 중간 중간 ‘오르트구름’이라는 알 수 없는 글자가 보였다. 단언컨대 눈이 띈 이후로 처음 마주한 낱말이었다. 오르트구름이 뭐야? 이 노래 제목은 요구르트구름이라고…


뭔가 이상한 낌새에 스크롤을 다시 올렸다.


하… 또 내 눈깔이 삐꾸였다.


요구르트구름은 무슨. 오르트구름이 맞았다. 나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아주 기깔나게도 뽑고 있었다. 혼자서 요란 난리법석.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아무도 없는데 괜히 부끄러웠다. 정말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움이 가라앉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럼, 도대체 오르트구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오르트구름은 태양계를 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가상의 천체 집단이라고 한다. 크기도 작은 데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가 셀 수없이 모인 집합이어서 실제로 확인은 불가능하다. 그저 태양계를 껍질처럼 감싸고 있구나, 정도로 상상만 하는 존재다.


까마득히 먼 오르트구름을 향해 보이저 호는 지금도 날고 있다.


보이저 호는 우주 탐사를 위해 발사된 우주선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항해하는 항해자이다.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는 각각 목성-토성, 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 탐사의 경로에 맞춰 쏘아 올려졌다. 원래의 임무를 모두 완수하고도 45년째 걸음을 멈추지 않던 보이저 호는 어느덧 태양계 권계면을 넘어 오르트구름을 깨뜨려버리고자 여전히 날고 있다.


아직 체감도 하지 못한 45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딘 보이저 호의 이야기. 요구르트구름 따위의 허무맹랑한 망상보다도 더 아름답고 감동스럽고 낭만적이다.


누구도 본 적 없는 낯선 우주를 탐사하기 위해 던져진 곳이 정말 겁나지 않았을까. 우주 방사선에 치여 얼마나 다치고 망가졌는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어둠만이 전부인 우주를 홀로 견뎌내야만 한다. 그 무모한 여정에 가슴이 답답했을 테다.


시간을 고스란히 지나오며 녹이 슬어버린 보이저 호의 심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한다. 끝이라 생각한 순간이 끝 모를 시간의 시작이 되어버렸지만 괜찮다. 그저 숨 한번 고르고 이어가면 된다. 울타리 밖에 일렁이는, 곧 잡힐 듯이 반짝이던 무언가를 향해. 언젠가 품에 안을 구름 너머 세상을 기다리면서. 보이저 호는 날아간다.


45년째 우주를 항해한 보이저 1호가 오르트구름을 완전히 통과하려면 앞으로 3만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무모한 시간 동안의 여정이 보이저 호에게는 어떻게 느껴질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생각에 짜릿할까. 아니면 가늠도 안 되는 숫자에 두려움이 앞설까. 정답은 보이저 호만이 알고 있겠지.


나보다 훨씬 오래 산, 앞으로 훨씬 더 오래 남아있을 보이저 호는 캄캄한 세상 속에서도 완주 없는 항해를 지속하기 위해 제 걸음을 걸어간다. 끝은 모르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는 보이저 호를 보며 오늘도 내 걸음을 만들어 본다. 그 걸음을 다시 깨워준 낭만적인 보이저 호에게 3만 45년만큼의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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