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4씀
정욱, 영화 「좋은 사람」
우리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나쁜 사람이 되기 싫은 걸까.
인간은 기왕이면 좋은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성품이 선하고 훌륭하여 남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인간은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좋은 말을 하고. 착하게 행동하고. 필사의 공을 들인 결과로 인간은 ‘좋은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 자신의 본질일까.
‘좋은 사람’이라 불리는 인간은 어쩌면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으로 치장된 그냥 사람, 어쩌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 영화 <좋은 사람>은 ‘경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 초반부의 경석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 교사로서의 지위로 학생들을 누르는 것이 아닌, 학생들을 믿고 존중한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경석은 좋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술을 먹고 학교에 찾아가 학생을 만나고, 제 분풀이를 위해 학생을 폭행한다. 사고로 충격을 받은 경석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순식간에 변해버린 것일까.
경석은 완벽한 좋은 사람이 되지도, 그렇게 치장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빈틈이 너무 많았다.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석의 문제 해결을 보자. 그는 돈을 잃어버린 학생에게 개인 사비를 쥐여준다. 어차피 찾아서 돌려줘야 할 돈이니, 자신이 미리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제 그 지갑은 본인이 잃어버린 거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좋은 선생님 같아 보인다. 돈을 잃어버린 학생에게는 돈을 채워주고, 문제 해결의 책임은 자신에게 돌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완벽히 실패했다. 책임을 본인이 질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가 떠안은 책임은 하나도 없다. 대신 본인이 돈을 채워줌으로써 사건이 끝났음만을 보여줬다. 그는 그저 사건을 덮었을 뿐 책임지고 해결한 것이 없다. 심지어 학생이 그 일을 말하면서 교실의 학생들이 모두 알게 되었고 비밀로 부치려 했던 것마저 실패했다.
세익이 도난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을 때 경석은, 선생님은 너를 믿지만 모두가 너를 믿게 하기 위해 그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쓰라고 말하며 세익에게 빈 종이와 펜을 건넨다. 그리고 여섯시까지는 돌아오겠다며 세익을 빈 교실에 혼자 두고 떠난다. 얼핏 보면 학생을 굳게 신뢰하는 좋은 선생님처럼 보인다. 세익이 맘 편히 진술서를 쓰려면 혼자 있는 게 더 낫겠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 완벽히 실패했다. 그가 딸을 데리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학교는 캄캄했다. 여섯 시라는 시각을 지켰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도 없는 빈 학교에 학생을 그냥 방치해둔 것이다.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하기엔 그렇게 하지 않을 방법이 너무 많았다. 미리 세익에게 글을 다 쓰면 두고 먼저 가라고 일러두었어도 될 일이고, 하다못해 다른 선생님에게 부탁해 세익을 하교 시킬 수도 있었다.
7살 딸과의 관계에서는 좀 다를까. 딸은 아빠인 경석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다. 노력을 한다고는 하는데. 딸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좋은 아빠가 되려고 경석은 부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이 역시 완벽히 실패했다. 엄마가 떠나기 전, “애가 왜 저러는지 생각도 좀 해보고.”라며 아빠에게 당부했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딸은 왜 아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답은 경석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차를 탄 순간부터 도로를 달리는 내내 울먹이던 딸을 경석은 한 번을 달래주지 않았다.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한 게 학교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 때 역시 딸을 우선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세익을 보내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기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딸을 혼자 차에 둘 수는 없고, 딸을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일단은 달래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닫혀버리고 다쳐버린 아이의 마음은 쉽게 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아이의 마음을 돌려보겠다고 “너 이럴 거면 혼자 내려서 엄마한테 가. 아님 아빠가 내릴까?”라며 윽박지르는 아빠에게는 더더욱 마음을 풀 수가 없다. 한순간의 장면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런 아빠와 가까워야만 하는 7살 아이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애가 왜 저러는지” 아빠만 모르고 있을 뿐인 이 상황을 아이가 굳이 견딜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는 점점 바뀌어가는 경석의 모습을 보며 깊은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의심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곧은 결심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흔들리기 마련이다. 특히나 인간의 마음에서 의심이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 틈은 아주 빠르게 번져 삽시간에 무너진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망가지는 본인을 지키기 위해 쓰고 있던 가면을 내려놓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내가 살고 봐야 하니까. 그럼에도 내가 경석을 연민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지도 않았던 그가 최소한의 선은 너무도 쉽게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경석은 세익을 딸의 병실까지 끌고 와 행패를 부렸다. 이건 세익 때문에 딸이 다쳤다는 의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 아내의 접근금지 신청 역시 세익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분노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화풀이가 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 대상으로 세익을 고른 것이다. 딸이 널 닮아 그런 거라며, 전 아내에게 폭언을 퍼붓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접근금지 신청까지 한 마당에 더 이상은 좋게 좋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고 발생의 책임이 분명 본인에게도 있는데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남 탓만 한다.
경석은 사건의 전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사고를 낸 운전자와 도난 사건의 진범인 학생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데 그 이유 역시 앞선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사고 가해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이유는 딸을 다치게 해서가 아니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왜 보지도 않은 것을 봤다고 해서 내가 세익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냐, 경석의 불만은 이것이었다. 학생의 뺨을 때린 이유 역시 같다. 왜 거짓으로 일을 꾸며서 내가 세익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냐, 그는 학생이 지갑을 훔쳐서 화가 난 게 아니라 그 일을 세일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것이 화가 난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은 세익을 의심하게 되었고 좋은 사람으로의 치장 또한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왜 날 학생을 의심하는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내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거냐고.’ 경석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에게는 사건의 본질, 그러니까 누가 사건의 범인인지보다도 누가 거짓으로 사건을 꾸며 나를 의심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가 더 중요했다.
경석은 좋은 사람에서 나쁜 사람으로 변해간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치장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도 너무 쉽게. 의심의 싹이 튼다고 누구나 다짜고짜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홧김에 술을 먹고 사람을 때리는 것 역시 누구나 하지는 않는다. 사고 가해자에게 분노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폭력의 이유가 잘못됐다. 딸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섭섭함에 화가 날 순 있어도 그렇게 된 데에는 본인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경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이 사회를 오래토록 존속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인간의 치장을, 치장을 위한 노력을 나쁘게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누구든 경석과 같은 상황이 닥칠 수 있다. 좋은 사람인 척 다 집어던지고 분노만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마음까지 막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양심만큼은, 그 양심 끝에 있는 선 만큼은 넘지 않기를 바란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결국 그 인간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좋은 사람이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