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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으니

by 와루


20220109씀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sf소설은 보통 과학 기술이 발전한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외계인과 접촉하고 우주선을 타고 날아다니고. 지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그려진다.


김초엽의 세계에서도 외계인이 등장한다. 우주여행을 하고, 다른 행성을 탐험한다. 하지만 김 초엽의 세계는 먼 미래스럽지 않다. 가까운 미래도 아닌, 꼭 현재 같다.


김초엽의 세계에서 과학은 주제가 아닌 그저 배경일 뿐이다. 김초엽의 세계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형태는 변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세계를 사는 인간이, 인간의 감정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은 과학의 부속물이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언제나 인간은 그래왔고 그러고 있고 그럴 것이다. 이 지구가 우주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변하지 않을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외계인과 교류하고 우주선을 타고 날아 다니는데도 소설이 당장의 현재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미래를 보며 지금의 인간을 반추하고 고민해본다.


세상은 다름을 이유로 차별한다. 어쩐지 그 차별은 세밀하게 나눠져 틈틈이 스며들어 사회의 장벽을 더 높이는 것만 같다. 그 다름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세상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입을 닫을 수밖에. 그저 당신이 준 그림을 읽고 또 읽기 만 할 뿐이다. 다름의 존재가 만약 인간의 기원이라면 그것 역시 인간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 이다. 위대하고 존엄한 인간의 의식에 사실은 다른 것이 깃들어있다니, 불쾌하고 끔찍하다며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리워한다. 다름의 존재를. 다름의 존재가 기원했던 고향 별을. 다름은 분명 머물렀고, 머물렀다 사라진 게 그리운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리움의 본능은 끝을 알고 있는 인간의 마지막을 더 부추긴다. 그리하여 마침내 끝이 정해진 그 길을 기꺼이 뛰어가게 만든다. 생의 끝이 그리움보다 덜 고통스러운 법이다. 그리움의 감정을 물화한다면 덜 고통스러웠을까. 물질로나마 위로를 받았더라면 아프지 않았을까. 고민의 답은 아무도 내릴 수 없다. 미웠더라도 존재했던 것의 부재는 쓸쓸하다. 그리움이라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것 역시 그리움이다. 쓸쓸함을 타고 존재를 뒤밟아보면 미움은 조금씩 사그라지고 어느새 이해가 싹튼다. 비로소 이해하게 된 존재. 그 존재가 가져야만 했던 부담감을 느껴본다. 누군가에겐 비난의 대상이자, 또 다른 이에겐 영웅 그 자체였던 존재의 부담감. 당신 역시 인간이었기에 그 부담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테다. 이제 당신을 이해한다.


미래에도 달라진 것 없는 인간을 읽는 건 묘한 기분을 일으킨다. 어떤 지속은 울적하고 어떤 지속은 아름답다.


생각해본다. 정말 변하지 않게 될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으니 그만큼 흐르는 시간에 풍화되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날이 선 부분은 둥글어지고 울퉁불퉁한 상처는 매끈해질 수 있지 않을까. 깎아 세공하면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지금보다 더 빛나게 될 부분도 있지 않을까. 지금부터 그때까지 비어있을 시간의 공백을 상상해본다. 그 상상의 시간으로 울적한 지속은 깎여 둥글어지고 아름다운 지속은 그 빛이 더 발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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