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3씀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모두 어린이 시절을 걸어오는 인간의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 어린이 때는 언제 어른이 되나, 싶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어른의 나이가 되어있다. 순간처럼 지나가는 어린이 시절은 그만큼 쉽게 잊히는 것 같다. 이 망각에 어른은, 자신은 어린이 시절 없이 자라온 마냥 유세를 부린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과거를 망각한 어른은 거리낌 없이 어린이를 배척하고 상처 입힌다. 일상을 누리기에도 벅찬 어른의 세상에서 어린이는 배척당하고 상처를 입으면서 성장한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맞춰진 세상을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종종 나이가 어리고 몸집이 작은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 명은 작아도 한 명인데. 한 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과 함께여야만 한 명이 될 수 있는, 나 하나로는 온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하나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어린이는 생활하는 내내 불편함 투성이다. 의자가 높아 붕붕 뜨는 어린이의 다리는 땅에 딛지 못하고 불안하게 자꾸 흔들린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도 어른은 자꾸 다리 떨지 말라며 타박을 준다. 모든 것이 궁금한 여행지에 가서 어른과 같이 설명을 듣고 싶은데 안내 데스크의 높이가 너무 높은 탓에 어린이는 듣지 못한다. 같이 듣겠다며 안내 데스크를 붙잡고 있으면 얌전히 있으라는 야단을 듣게 된다. 노키즈존이 도입되는 곳이 많아지면서 다닐 수 있는 곳마저 점점 줄어든다.
불편함을 넘어 생의 위협을 받는 어린이도 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매일을 울면서 보내는 어린이의 몸에는 멍이 가득하다. 고통에 지쳐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다. 어린이의 생을 제 맘대로 결정짓는 인간 같지 않은 어른은 그 죄의 책임을 다하지도 않는다. 다른 어른은 잠깐 화를 내가다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저출생이 국가적 재난이라는 듯, 뉴스에서 연일 떠들어대고 있는 나라에서 어린이의 존재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른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절은 망각되더라도 시절에 묻어있는 감정은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어린이 시절에 누구와 재밌게 놀았는지, 언제 아름다운 바다를 보았는지, 어디서 찬란한 멜로디를 들었는지, 어른이 된다면 아주 세세한 일상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꼈던 재밌게 놀았을 때의 즐거움, 아름다운 바다를 보았을 때의 행복, 찬란한 멜로디를 들었을 때의 감동은 몸 어딘가에 깊이 기억되어 있다. 그리고 문득문득 저도 모르게 그때의 감정이 사르륵 떠오른다. 마치 기억저장본부에서 누군가가 기억구슬들을 꺼내다가 닦아주는 것처럼. 그때 피어나는 기억들은 전혀 흐릿하지 않다. “시차는 추억을 더 애틋하게 만들고 상처를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어른에 의해 부정당한 어린이는 당연하게도 부정당한 감정을 안고 성장한다. 그 감정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불쑥 돋아나는 감정에 아파할지도 모른다. 시차를 먹으며 몸집을 불린 상처는 더 치명적인 법이니까.
어른은 가끔 착각을 한다. 이 세상이 어른만의 것이라고. 어른의 손으로만 일구어낸 것이라고. 정말 대단한 착각이다. 세상은 어른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도 세상을 만들고 가꾼다. 아무데나 담배연기를 내뿜고 침을 뱉는 어른과 달리 어린이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침을 뱉지도 않는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국에도 어른은 유흥에 미쳐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데 어린이는 제 필수 생활공간인 유치원에서도 방역을 위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건 어쩌면 어린이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어린이는 아름다운 세상을 온전히 누려야 마땅하다. 어린이 또한 세상의 주인이니까.
세상의 주인으로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 대접을 받으며 성장한 어린이는 어떤 어른이 될지 상상해 본다. 망각되지 않는 감정 중에서도 치명적인 상처보다는 애틋한 추억이 더 많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 애틋한 추억에 고단한 어른의 현재도 잘 견뎌낼 수 있지는 않을까. 그 애틋한 추억을 자라나는 또 다른 어린이에게도 선사해 주려 하지는 않을까. 이런 어른이 가꾸는 세상이라면 좀 더 건강하고 빛나는 세상이 되어있지 않을까.
지금을 살아가는 어린이가 행복해야 하는, 이보다 더 완벽한 이유가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