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6씀
사라 스미스, 영화 「고장난 론」
나만 비봇 없어!
바니는 학교에서 늘 외롭다. 다들 옆에 끼고 있는 비봇이 자신만 없기 때문이다. 비봇이 있으면 sns로 연결된 세계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친구도 더 많아질 텐데. 그럼 외롭지 않을 텐데. 바니는 비봇이 꼭 필요했다.
그런 바니 앞에 드디어 비봇이 나타났다. 비봇의 이름은 론. 근데 론이 좀 이상하다. 다른 비봇들과는 많이 다르다.
론에게 ‘고장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간단하다. 네트워크 접속이 안 되기 때문이다. 비봇은 네트워크 접속을 통해 sns를 활성화한다. 사진을 공유하고 동영상을 제작해서 팔로워를 늘린다. 이를 통해 어린이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비봇의 역할이다. 하지만 론은 이런 걸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런데 론은 정말 고장 난 로봇일까.
고장이란, 기구나 기계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기능상의 장애를 뜻한다. 단어의 정의에 따르면 론은 어쩌면 고장 나지 않은 로봇일 수 있다.
네트워크 접속이 되지 않을 뿐, 충전만 잘해준다면 론은 알아서 잘 움직인다. 바니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면 친구로봇으로서의 자격도 충분히 갖추었다. 바니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장난치며 웃어준다. 바니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때려주기도 한다. 심지어 친구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아는 로봇이다. 바니가 숲속에서 지쳐 쓰러져 있을 때 남은 전력을 모두 끌어모아 사람들 곁으로 데려다준 게 론이었다. ‘고장난’ 로봇으로서 언제든 폐기처분의 위협을 안고 있음에도 말이다.
고장이란, 인간의 몸에 생긴 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몸에 깃든 마음도 언제든 탈이 날 수 있다. 아니, 지금 인간의 마음은 단단히 탈이 났다.
인간은 비봇이 없는 다른 인간을 따돌리고 괴롭힌다. 보통의 것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무시하고 외면한다. 비봇을 갖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다. 모두가 비봇과 함께인 무리에 속하지 못한 인간은 결국 소외되고 만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콘텐츠를 양산한다. 그 콘텐츠로 상처를 입은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다. 잊혀질 권리가 없는 네트워크 세계에서 인간은 끝없이 상처를 입는다. 상처 입은 인간은 결국 현실의 세계에서 고립되고 만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다른 인간들의 비봇을 통제하고 수집된 정보를 개인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각각의 수집 정보가 다른 개인의 프라이버시임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목적을 위해 가볍게 무시한다. 인간은 어린이의 꿈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인간은 비봇을 활용해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을 뿐이다. 비봇이 어린이의 진정한 친구가 되든지 말든지, 어린이의 내적 성장을 돕든지 말든지, 별 관심 없다. 그저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된다.
고장 난 건 로봇이 아닌, 인간의 마음이다.
세계는 인간이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연결하면서 만들어졌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손을 잡으며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해주면서 더 넓어지고 단단해진 세계는, 인간이 손을 놓아버리면 붕괴하고 말 것이다. 고도로 발전된 정보통신기술로 점차 기계화 되어가는 인간사회는 단절되고 삭막해진 것처럼 보인다. 단절은 곧 세계의 붕괴를 뜻하기에, 이러한 변화가 걱정스럽고 탐탁지 않은 인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 기계의 탓이 아니다. 기계를 쓰는 인간의 탓이다. 고장 난 마음을 먹은 채로 기계를 쓰는 인간만의 탓이다.
기계화된 사회가 맘에 들지 않고 단절될까 걱정이 된다면 인간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인간 스스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인간 스스로 고장 난 마음을 고쳐야 한다. 인간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오로지 인간의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론과 바니와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