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불호의 경계선

by 와루


20200310씀


호불호는 생각보다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내가 무엇을 호하느냐에 따라 또 무엇을 불호하느냐에 따라 내가 만들어지고 나의 주변 환경이 갖춰지며, 호불호가 선명할수록 그 사람만의 색이 뚜렷해진다.


나는 그 호불호가 음악에서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잔잔한 음악보다는 빵빵 터지면서 박살나는 사운드를 좋아하고 띵똥거리는 전자음보다는 라이브의 밴드 사운드를 선호한다. 가사를 곱씹으며 음악을 듣기 보다는 멜로디에 스며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 플레이리스트에 '백예린'은 들어올 일이 없었다. 관심 밖의 음악이었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장르였다.


어쩌다 보게 square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하필이면 처음 만난 예린이 레전드라 일컬어지던 살랑거리는 초록 원피스의 square라니. 그때 처음 깨달았다. 너무나도 뛰어나면 호불호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선명했던 호불호간의 경계가 붕괴되어버린다는 것을.


영상에서 본 공연장에서의 square는 라이브 밴드 사운드였지만 온전히 내 취향의 밴드 사운드라고 할 수는 없었다. 굉장히 로맨틱한 사운드였고 잔잔했으며 듣기 편안한 음악이었다. 만약 그 초록의 square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음악만 들었더라면 이렇게 푹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필 처음 본 예린의 영상이 그 초록의 square여서 나의 호불호에 대한 모든 신경이 마비되었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초록 잎처럼 살랑거리는 예린은 그 자체로 신비로웠고 싱그러웠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토록 산뜻하게 노래를 할 수 있을까. 노래뿐이 아니었다. 그가 하는 모든 제스쳐, 표정 하나하나가 생그러웠고 봄같았다. 마치 날 좋은 때에 넓은 잔디밭을 뒹굴고 있는 것처럼 싱그러운 풀내음이 진하게 전해져 오는 듯 했다.


그 이후로 예린의 앨범 전체를 들어보았다. 밴드 사운드가 들리는 듯하면서도 신비로운 소리가 바탕을 이루었고 멜로디도 좋지만 음악을 듣다보면 가사에 더 집중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처럼 아름다운 가사에 몇 번이고 곱씹어보곤 했다. 무엇보다 잔잔하면서도 기저에 우울함이 깔려있는 듯한 그 특유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모든 것이 내가 호하던 것과는 생판 달랐다.


그럼에도 찾아들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계속 들었다. 그냥 좋았다. 음악 안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고 싱그러운 과일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마저도 그 음악이 날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토닥여주고 품어주는 것 같았다.


예린의 음악에서 단연 1등으로 꼽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음색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음색을 가졌다. 뭔가 단단한 듯 하면서 하늘하늘하고, 막힌 듯 하면서도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지는데,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포근하다. 음역대가 낮을 때는 듣기 편안하고 높을 때면 깨끗하고 개운한 느낌. 그의 타고난 음색 덕에 어떤 음악이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음색이 호불호를 넘어서는 어떤 무언가를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색을 선물 받은 느낌은 어떨까. 사실 그건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그저 찬란히 빛나는 음색으로 음악을 남겨주는 그 자체로 감사할 뿐이다.


지금 와서 보면 예린의 음악은 나의 호불호를 붕괴시켰다기보다 호의 경계를 더 넓혀줬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날 그 초록의 square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훌륭한 아티스트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지나갔겠지. 단지 취향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들어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장난 건 인간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