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31씀
사람들은 과학을 절대적인 객관의 영역으로 인식한다. 과학은 객관적 증거를 토대로 이론을 구축하는 학문이므로, 무엇보다도 가치중립적이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다. 과학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과학 또한 틀릴 수 있고, 과학마저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과학 속 그늘진 여성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접한 건 민음사 유튜브를 통해서였다. 당시 민음사는 2022 서울국제도서전 준비과정을 콘텐츠로 만들면서 이 책을 소개했다. 영상을 보고 많은 관심이 생겼는데, 과학의 시선으로 여성의 삶을 바라본다는 주제는 물론이고 그만큼 책의 물성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서전에서 본 책의 실물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에, 시선을 사로잡는 빨간색까지. 별만큼 많은 책 중에서도 단연 탁월했다.
이 책은 총 12장의 본문으로 성염색체, 섭식장애, 냉동난자, 인공지능, 성형수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과학과 여성을 연결시켜 읽어낸다. 다만 그만큼 깊이 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한 주제에 대해 구체적 해답을 찾기보단, 다양한 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에 집중했다. 저자 임소연은 여성들이 과학을 싫어하지 말고 좋아해주기를 꿈꾼다. 두려워하지 말고 과학계에 진출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책이 첫 발을 디디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가벼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 듯하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높은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낮아진 진입장벽을 넘어 들어온 사람들은 이제, 둥둥 떠 있는 12가지의 주제를 보며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에 눈이 뜨일 것이다.
나에게 시야 확장이 일어난 건 차별적인 세상에서 창조되는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야기하는 7장과 8장이었다. 이 파트들이 인상적인 이유는 과학을 다루는 저자의 태도 때문이다. “타협은 내 인생 전략”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적절한 타협을 통해 지난 오류들을 수정하고 조금 더 나은 해답을 찾아간다. 인간의 편견을 없애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나, 당장에 이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인공지능을 통해 오히려 편견을 가시화하자고 주장한다. 돌봄은 여성이 맡는 게 익숙하다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인간을 보조하는 로봇은 보통 여성을 닮았다. 이에 저자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거나, 아예 인간의 외형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로봇이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별적 인식의 개선이라는 근본적 해답보단,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점 수습에 집중하는 저자의 해답이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 해답까지 다다르기엔 많은 시간과 상당한 에너지를 소진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저자의 의견에 섣불리 반대를 표하기도 어렵다. 과학계 여성들이 불평등과 편견으로 점철된 허물들을 보며 궁극적인 성 평등을 꿈꾸다가도, 언제 올지 모를 그 미래에 낙담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저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말한다. 더디더라도, 꾸준히 걸어가자고. 까마득한 미래에 압도되어 좌절하지 말고, 현실과의 타협을 찾아보자고. 궁극의 이상은 목표로 두되,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에 집중하자고.
누구나 언제든 이 같은 상황에 마주칠 수 있다. 목표가 아득히 멀어보여도 열심히만 하면 이뤄낼 수 있을 거라고 믿다가도, 그래서 자신의 열정과 감정을 동력삼아 스스로를 태우며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전혀 다가오지 않는 그 끝에 좌절할 때가 있다. 주저 앉은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 여기고 울적해지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현재와 무사히 타협을 하면 나를 잘 돌보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그 타협이란 제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나가기 위한 준비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말이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현재와 좋은 타협을 이루어 지속가능한 걸음을 걸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