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은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 체계로 정의된다. 쉽게 말해 생각의 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패러다임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이를 정답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패러다임은 일부 바뀌거나 혹은 아예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던 시대에는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생물학 패러다임의 전환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 루시 쿡은 수많은 동물들을 직접 만나고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수컷은 적극성을, 암컷은 수동성을 상징한다는 믿음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그가 바라본 동물의 세계 속 어떤 무리는 암컷이 바람피우는 게 일상이어서 새끼들의 아빠가 여럿 존재한다. 또 어떤 집단은 적극적인 성생활을 즐기는데 그 대상이 꼭 수컷이지만도 않다. 어떤 지역에서는 피의 산물혹은 협치의 결과로서 대장 암컷을 만나볼 수도 있다.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다. 저자는 이 모든 삶의 형태가 생존을 위한 진화에서 비롯되었음을, 따라서 그저 자연의 섭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환경에 맞춰 진화해왔던 자연에서는 어떠한 패러다임의 작동 없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인간들은 수컷의 선택과 암컷의 순응이라는 개념이 자연의 섭리이며 온 지구상에 적용되는 패러다임이라고 주워섬겨왔다. 이 패러다임 안에서 "자연에선 다 그래"라는 말로 지배하는 역할은 남성이, 그에 따르는 역할은 여성이 맡는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이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남성중심적인 과학계의 무신경함 때문이었다.
남성이 디폴트인 과학계에서 여성은 치밀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수컷을 연구한 후 이와 같다고 지레짐작하거나 혹여나 다른 점이 발견될 경우에는 단순한 변이라고 치부하고 말았다. 차이에 대한 인과관계를 알아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실제와는 다른 연구결과가 통념으로 널리 퍼지고는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이트먼의 오류이다. 베이트먼은 초파리 실험으로 오직 수컷만이 난교를 통해 번식상의 성공 이점을 얻는다고 말했다.
트리버스는 베이트먼의 논문을 인용하여 수컷의 문란함과 암컷의 정숙함이 과학적인 논리임을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성 역할의 편견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남자가 방탕하게 사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여자는 얌전하게 이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 연구 결과는 이와 달랐다. 암컷도 다양한 수컷을 만나면서 번식 적합도를 높이는 이익을 취했다. 암컷과 수컷 모두에게 이득이 있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왜 실험 결과를 취사선택하였는지 묻는 질문에 트리버스는 "염치없게도 개인적인 순수한 편견이었다."라고 답했다. 자연의 세계가 편견이 없을지라도, 그 자연을 바라보는 과학자의 시선이 편견에 고여있다면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얼마든지 차별적일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을 인간중심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일례로 오리의 강제된 교미를 들 수 있다. 여러 수컷 오리들이 한 마리의 암컷 오리에게 몰려들어 강압적으로 교미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치 '강간당하는' 것 같아서 수컷의 선택과 암컷의 순응이라는 패러다임에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번식기가 되면 암오리의 질은 일자 모양에서 나선형으로 변한다. 그 방향이 수컷의 음경과는 반대로 꼬여있어 원하지 않는 교미가 진행될 경우에는 생식기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다고 한다. 암컷의 맘에 들지 않는다면 수컷이 교미를 강제하더라도 그 정자는 버려진다. 즉 암컷이 수컷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연 현상을 무시한 채 '강제된 교미'를 '강간'으로 해석한다면, 자연의 이치로서 강간은 합리화될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의 강간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이 있었다. 동물의 세계를 근거랍시고 들며 성적 차별과 폭력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케이스 때문에 동물에 대해 언급할 때는 인간적인 용어를 배제한다고 한다.
동물의 세계를 핑계삼아 인간세계의 부조리를 합리화하려는 일부(어쩌면 다수)의 사람들 때문에 생물학계에서는 동물의 의인화를 철저히 경계한다는데, 나는 생물학자가 아니라서 어떤 동물들의 세계는 자꾸 여기가 인간세계였으면 하고 읽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보노보였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인간과 같은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삶의 형태는 정반대이다. 부계 중심의 침팬지와 모계 중심의 보노보, 보노보 사회를 선망한 건 모계사회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같은 모계사회인데도 미어캣은 꺼려지고 보노보는 부러웠던 건 그들의 자매애 때문이다.
보노보는 암컷끼리 연합하여 동맹체를 구성한다.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거대한 무리를 지어 다같이 생활하는데, 그 덕분에 수컷의 공격에도 수월하게 대응하면서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는 싶지만 보노보를 본받아서 지금 당장 모든 권력관계를 뒤집어버리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다만 여성들끼리 연대감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느슨하게나마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내 가족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여성의제라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의식해주면 좋겠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주장보다는 여러 명의 외침이 더 큰 법이니까. 하나의 발자국이 모이고 모여 넓은 길을 내는 법이니까. 서로가 서로의 기둥이 되어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흩어지지 않을 수 있게.
보노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이 문장은 보노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제 패러다임 아래서 인간세계는 오랜 시간 암컷을 무시하고 여성을 곡해했다. "자연에선 다 그래"라며 수많은 성편견을 마땅한 일로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로 맞이한 현재가 암울하지만, 더 이상 패러다임 속에서 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등장이 반갑기도 하다. 틀린 것은 고치면 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으면 된다. 편견은 깰 수 있고 패러다임은 바꿀 수 있다. 책 속 많은 연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들의 행보에 응원을 보태며, 왜곡된 패러다임 속에서 구겨지고 뒤틀렸던 여성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곧게 자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