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평생을 두고 일궈가는 독서습관
"선생님~! 이 책 진짜 재미있더라고요~!"
어제 추천한 '고양이학교' 1부 1권을 들고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오는 녀석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1부 2권을 건넸다. 그림책에서 줄글 책으로 넘어가는 타이밍을 놓친 중학년들에게 권해서 실패한 적이 없는 책이다. 감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판타지동화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재미와 작품성을 두루 갖춘 책이다. 다만… 엄청 길다. 그래서 더 좋다!
밤마다 30분씩 읽어주면 일 년 정도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 혹시 그 전에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 아이가 직접 읽어버리면 한 달 안에도 다 읽을 수 있다. 스스로 읽을 의지가 있는 아이에게는 책을 소개해 주고, 읽을 시간을 만들어 주면 된다. 아이는 읽고 나서 스스로 읽어낸 성공 경험으로 성장할 것이다. 읽을 의지가 없는 아이에게는 읽어주면 된다. 아이들은 보통 읽기능력보다 듣기능력이 더 좋다. 들어서 이해하는 수준과 읽어서 이해하는 수준이 같아질 때 까지는 읽어주는 도움이 필요하다. 모든 성장이 그러하듯이 그 ‘때’는 아이마다 다르다. 만약 아이가 들으면서 상상는데 성공하고, 그래서 긴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드디어 평생독자의 길로 한 발 더 다가서게 된다.
자녀가 독서를 즐기지 않거나 아예 책을 멀리한다고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부모님들이 많다. 아무리 책을 읽으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어 답답하고 속상하다는 것이다. 말 안 듣는 문제의 아이를 둔 그분들께 하루 10분만이라도, 단 몇 장만이라도 아이에게 '읽어주기'를 석 달만 해 보시라고 권한다. 물론 이 활동을 한다고 해서 아이가 금세 책을 즐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같다.
이 활동의 기대효과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읽어주기'를 하는 순간만이라도 '책 읽는 부모'가 되는 시간을 선물해 준다. 부모가 책을 읽는다고 모든 자녀가 독서를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책을 즐긴적이 없는데 자녀가 책을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다.
두 번째는 독서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읽어주기'를 제안받은 거의 90%의 부모님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강한 의지와 목표를 가진 성인조차 꾸준히 하기 힘든 것이 '독서'이거늘. 게임과 유튜브가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학원시간에 쫓겨 사는 아이들에게 '독서'라는 것이 얼마나 즐기기 어려운 취미인지 깨달으며 아이를 이해하게 된다.
아이를 향한 고민과 비난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이다. 서로 이해하고 관계가 좋아야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같이 갈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이들은 주 양육자의 식습관을 닮아 비슷한 체형과 건강상태를 물려받는다. 주 양육자의 성품을 닮아 결이 비슷한 그릇을 물려받는다.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부모에게 없는 독서습관이 아이에게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품지 않은 달걀에서 병아리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어느새 70이 훌쩍 넘어버린 나의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첫새벽에 일어나 아파트 뒷산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신다. 벌써 40년도 더 지난 습관이다. 토요일 아침. 늦잠을 즐기고 싶은 어린 나를 굳이 깨워 뒷산에 끌고 가는 아버지가 정말 귀찮았고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렸고, 당연히 잠이 훨씬 더 달콤했다. 어쩌면 운동과 부지런한 습관에 대한 조언을 하셨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에는 남아있는 말씀은 없다. 그저 매일 새벽. 뒷산으로 향하는 아버지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만이 기억에 선명하다.
가족이 그 성실함을 알아주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평생 한결같으셨다. 배운 것 없이 맨손으로 도시에 나와 학업을 이어가고, 가정을 일구고, 재산을 불리는 그 어려운 와중에도 한마디 불평 없이 작은 한걸음을 끝없이 내딛으셨다. 어린 날의 나는 솔직히 이런 아버지가 그저 답답하고 지루해 보였다. 당연하게도 나는 등산을 즐기지 않는 성인으로 자라 독립했다. 졸업과 직장생활, 결혼, 임신, 출산, 양육 등 삶의 숙제를 풀어가며 살기 바빴던 젊은 날들. 누구나 그렇지만 살다가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린 시절이 있었다. 미움과 원망이 가득 차서 아무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이성이란 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날들이었다. 삶과 죽음을 고민하느라 일상이 피폐해지던 그 때.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새벽마다 집 근처 문수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산을 찾아가 육신을 다그치며 무너져가는 멘탈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 인이 박히게 긴 세월 보여주신 아버지의 성실함이 위기의 순간 나를 살게 했다. 아버지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내게 사는 법을 알려 주셨다.
나는 동화구연으로 태교를 했고, 두 아들이 아기일 때 집에 TV를 없앴다. 두 아들이 중학생이 될 때 까지 책을 읽어 주었고, 스마트폰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용했다. 두 녀석은 정말 많은 책을 읽었고, 나와 많은 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큰아들의 견해는 날카로웠으며, 작은아들의 상상력은 늘 내 뒤통수를 쳤다.
“사서 선생님은 자녀들에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줬으니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겠네요?”
학부모님들은 독서교육의 말미에 내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그렇게 독서하는 환경을 만들고 열심히 독서한 결과 나는 독서가의 삶을 살고 있다. 반면에 현재 고3, 고1인 두 아들님은 책을 즐기지 않는 비독서인구의 한쪽끝에 서 있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스마트폰 속에 자주 들어가 있고, 학업을 이유로 너무 바쁘고, 게임이 훨씬 더 재미있는 대한민국 청소년으로 건장하게 변모했다. 조금 다른점이 있다면 부모와의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다는 정도?
기대하던 실험결과를 알려드리지 못하게 되어서 나 역시 무척 유감스러운 바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삶은 현재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중이다. 아버지의 오랜 성실함이 내 안에 남아 결국 나를 새벽마다 뒷산 정상에 올려다 놓았듯이 나의 꾸준한 독서가 아이들의 삶에서 독서가 필요한 어떤 날 책을 펼쳐드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아이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배운다. 여태 '책 읽는 부모'가 아니었으니 욕심을 접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늘부터 실천하면 된다. 하루, 한 달, 일 년으로 완벽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시간의 힘은 분명히 아이에게 가 닫는다. 물론 어렵다. 지금까지의 개인적 임상결과에 의하면 가장 쉽고 확실하게 독서교육의 효과를 보이는 대상은 ‘나’이다. 그러니 오늘 내 발을 독서의 길목으로 한걸음 내딛는 가장 쉬운 시작을 권해 드리고 싶다.
일정한 일을 이 주 동안만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그것은 습관이 된다. 그것을 이 개월 정도 지속하다 보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이 되다. 몇 년을 계속하다 보면 사람이 바뀐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습관은 나를 구성하며 나의 가치를 드러낸다.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 손웅정 / 수오서재 /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