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이 자꾸 늦어지는 것은 부족한 업무능력 탓인지, 과중한 업무 탓인지, 여태껏 놓지 못한 완벽주의 탓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새 학기의 시계는 내 편인적이 없었다. 퇴근이 늦어도 꾸역꾸역 저녁 루틴을 지키다 보니 취침이 늦어지고 급기야 수면리듬이 깨졌다. 결국 늦잠이란 것과 박치기를 했다.
아침에 싸한 느낌과 함께 눈을 번쩍 떠 보니 8시 1분! 정말 습관이란 것이 무섭다. 무의식 중에도 평소에 지키는 7시간의 수면을 꽉 채우고 눈을 뜨다니... 시작부터 시간에 끌려가며 시작된 하루는 온종일 나를 끌고 다녔다. 퇴근 무렵 정신을 차려보니 커피 한잔도 제대로 못 마시고 저녁이 되었다.
퀭한 눈가를 버석한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어질러진 책상이 내 머릿속인 듯 너저분하다. 계획했던 일을 얼추 다 해냈음에 안도하는 마음도 잠시. 축 처지는 기분과 함께 비내리는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비가 내리고 있다는것도 몰랐다. 지친다. 아이들과 도서관에 쏟아낸 에너지만큼 다른 사람의 온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친한 샘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급히 짬을 내어 밥 한 그릇 뚝딱 먹고 헤어졌지만, 별 이야기 못 나눴지만, 별 근심 없이 웃으며 먹으니 밥이 참 맛있다. 마주앉은 이가 밥그릇을 싹싹 비워내며 먹는 모습을 바라 보는것은 식사시간에 즐길 수 있는 가장 즐거운 그림이다. 무겁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피곤함을 핑계로 참석을 포기하려던 저녁 책모임으로 발길이 옮겨진다. 참... 습관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신기한 녀석이다.
그곳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만나 그림책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책강정'동아리의 '튀밥'멤버들이 있다. 간식을 먹으며 근황을 나누고, 골라온 그림책을 읽고, 그 속의 철학과 마음도 나누는 그녀들과 오늘의 마지막 시간을 꽉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살뜰히 쓴 시간만큼 가슴가득 따스함이 충전되었다.
퇴근할 때 절인 배추 같던 내가 이렇게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어디서 생겨났을까 되짚어 보니 퇴근길에 본능적으로 충전소를 두 군데나 거쳐온 내가 보였다. 내 인생이 좀 괜찮아 보여서 잠시 혼자 미소 지었다. 고성능 사람 충전소가 이렇게 지척에 함께하는 삶이란 참...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