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모르는 척, 괜찮은 척, 안보이는 척
내가 근무하는 학교와 이웃한 초등학교에는 여태 사서가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사서교사 S 가 새로 부임했다. 그곳으로 전근을 간 친한 선생님의 새 학기 안부인사에 S의 소문이 봄바람처럼 실려왔다. 새로 온 사서교사가 서가 배치를 싹 바꾸고, 장서정리를 새롭게 했다고. 학교 여기저기에 책 읽는 공간을 마련해서 아이들이 오며 가며 독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덕분에 아이들이 손에 책을 들고 복도를 지나가는 신기한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칭찬이 제법 길었다.
학년별로 독서교육이나 도서관 이용교육도 하고 도서관 이벤트도 다양하게 하는 등 S가 어찌나 독서교육을 체계적으로 잘 꾸려가는지 학교 특색사업을 아예 '독서'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사서 없이 도서관이 방치되다시피 하던 학교이다 보니 기존에 근무하던 학교 선생님들의 감동이 더욱 남달랐다. 감탄 섞인 칭찬에 괜히 내가 같은 사서랍시고 절로 목에 힘이 들어갔다. 친분도 없는 이웃 사서 S의 소식에 나는 무척이나 뿌듯했다.
지난 겨울에 학교도서관 지원센터 주관으로 인근지역 초등학교 사서교사와 전담사서들이 모두 함께 협의회를 진행한 적이 있다. 서로 왕래가 잘 없는 사서교사와 전담사서 두 그룹의 조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최근에 도서관 리모델링을 마친 한 초등학교를 탐방할 겸 모인 자리에서 야무진 눈빛의 S와 처음 인사를 나눴었다.
‘전담사서’는 사서교사를 거의 채용하지 않던 시절에 임용시험 없이 면접으로 채용된 공무직 직군이다. 수업권이 없지만 오랜 경력으로 쌓인 도서관 운영 내공이 상당하다. ‘사서교사’는 최근 몇 년 동안 채용이 조금씩 늘면서 불어난 직군으로 임용시험을 거쳐서 정식 교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한다. 교과연계를 통한 수업을 고민하는 등 ‘사서교사’로서의 업무도 크지만 기본적으로 학교도서관을 꾸려가는 1인 관장이라는 점에서 ‘전담사서’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근무한다. 그렇다 보니 진상 학부모에 대한 푸념도 나누고, 독서의 적은 학습만화인가 휴대폰인가에 대한 견해도 나누며 금새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전담사서’와 ‘사서교사’들은 도서관운영 전반에 걸친 경험과 정보를 나누고, 이웃 학교들의 현황도 전해 들었다. 듣다보니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생생한 현장의 귀한 소식이 넘쳤다. 전담사서의 숙련된 꿀팁들, 사서교사의 젊은 패기와 새로운 시각이 어우러졌다. 다음 번에도 또 이런 자리를 꼭 마련해 보자며 아쉬운 인사로 자리를 정리했다. 교사니 공무직이니 하는 직군의 차이는 업무현장에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매년 봄이면 교육청에서 ‘책톡!900’이라는 독서동아리 공모사업 신청을 받는다. 독서동아리에 관심 있는 선생님이라면 누구든 신청해서 담당자로서 진행할 수 있는 사업이다. 아무래도 ‘독서’이다 보니 국어과 선생님이나 사서 선생님들이 많이 신청하는 편이다. 올해도 열정적인 사서 선생님들이 이 사업을 많이 신청했다. 우리 학교도 4년째 이 독서동아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데 올해 갑자기 사업운영 방침이 변경되었다며 이 사업에서 모든 전담사서를 일괄 배제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해마다 이 공모사업을 잘 꾸려왔던 전담사서들의 학교는 일제히 난감해졌다. 무엇보다 기다리던 학생들이 피해를 보게 생겼으니 말이다. 담당 장학사에게 항의가 꽤 들어갔던지 결국 전담사서의 참여도 허락한다는 정정 공문이 교육청으로부터 다시 내려왔다. 후에 전해들은 바로는 이를 지켜보던 사서교사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독서토론리더’ 교육과정을 신청했다가 ‘교사’도 아닌 사람이 감히 교사대상 교육을 신청했다며 관리자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났었다. 덕분에 쓸데없는 열정은 독이 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당시 전담사서를 위한 독서교육은 전무했고 교사를 위한 ‘독서토론리더’교육은 신청자 미달이었다. 나는 그날 전담사서는 발전할 필요가 없다는 교육청의 메시지를 가슴에 깊이 새겼다. 그때 나는 결국 교육을 받지 못했었지만 이번 독서동아리 공모사업 사건은 일정이 다소 늦춰졌을 뿐 잘 해결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잊을만 하면 발생하는 이런 내부적 편가르기 사건은 왕왕 있어왔기에 새삼 놀랍지도 않다. 이러니 전담사서와 사서교사 두 그룹의 왕래가 뜸한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로널드 A. 하이패츠의 ‘어댑티브 리더십’ 제2권의 부제목은 ‘방 안의 코끼리’입니다. 변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임에도 안정상태를 유지하고자 무시되어 온 문제를 ‘방 안의 코끼리’에 비유합니다. 조직 내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방 안의 코끼리’를 밖으로 내보내는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을 주입하는 일제식 수업을 비판하면서도 변화의 출발선에 서지 못합니다. 미래 인재가 가는 길을 ‘학교의 코끼리’가 막고 있습니다. ‘학교의 코끼리’를 밖으로 보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최고의 질문을 하는 사람, 북퍼실리테이션 / 황정혜 / 박이정 / 2022년 출판 -
배를 신속하게 몰아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모든 사공이 함께 힘을 모아서 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엉뚱한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공, 노 젓는 법을 잊은지 오래된 사공, 노 젓는 신기술을 배운 사공, 홀로 더 많은 노를 저어야 하는 사공. 이들이 섞여서 노를 젓는 배는 과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정확하고 안전한 항해에 공동의 비전과 협력.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학교에서 근무하지만 교원은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리지만 교사는 아닌 교육공무직 전담사서이다. 전담사서가 젓는 노는 방향도 방법도 알것없이 대충 손에 들고만 있으면 되는게 아닐까? 불편한 코끼리와 다시 한번 정면으로 마주하던 날. 나는 온종일 일손을 놓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 척하는 거대한 '도서관의 코끼리' 앞에서 나도 안 보이는 척 눈 감았다. 나는 노력이 무용한 일개 직장인일 뿐이지 않은가. 다만 세상의 모든 조직안에 버티고 있는 '방 안의 코끼리'들이 사라지는 후련한 어느 날을 마음속으로 몰래 몰래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