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날 있잖아요...

ㅣ 혼자라고 느껴질 때. 왜, 그런 날 있잖아요...

by 느닷

벌써 5통째 돌리는 전화이건만 학부모님 중 누구도 도서관으로부터 걸려 온 연체통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번호를 알고 전화를 피하는건가 싶은 합리적 의심과 피로가 쌓일 때 쯤 한통이 연결되었다. 지난 학기에 빌려간 책이 87일째 연체중인 서영이의 부모님은 기분이 안좋으신 것 같았다.

“거~참! 애가 반납을 했다고 하는데 왜 자꾸 반납을 하라고 하는거예요? 나는 그런 책을 보지도 못했다니까요!”

이럴 때는 보통 ‘죄송합니다’와 ‘죄송하지만’을 문장 사이에 적절히 넣어서 응대해야 통화를 빨리 끝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날은 더 이상 통화할 수 없는 마음이 된다.


연체독촉을 포기하고 서둘러 내일 있을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필요한 배너를 출력하러 갔다. 행사의 분위기를 잘 전달할 수 있는 그림과 문구를 넣어 배너를 디자인한 다음 대형 플로터 (프린트)에 연결된 컴퓨터로 출력을 명령하면 플로터는 가로 60cm, 세로 180cm의 대형 배너를 컬러풀하게 뽑아준다. 물론 플로터 컨디션에 따라 협조가 잘 안될 때 도 있다. 하필 오늘이 그날이다. 출력되다가 잉크 부족으로 중단. 출력되다가 용지 부족으로 중단. 새 용지를 인식하지 못해서 출력 불가….


10분이면 끝날일을 붙들고 플로터와 1시간 넘게 씨름했다. 퇴근시간은 훌쩍 지나버렸고 복도에는 적막이 흘렀다. 행사는 당장 내일 아침인데, 배너 출력은 안되고 마음이 해저 구만리를 찍고 가라앉을 때 쯤. 당직 주무관님이 복도를 돌며 차곡차곡 불을 끄셨다. 고요함 속에서 어렵게 출력해낸 배너를 막대에 걸고 한 발짝 떨어져 바라왔다. 배너가 밉살스럽기 그지없다.


비가 내리는 건 맞지만 우산을 받쳐드는 건 번잡스레 느껴지는 그런 비가 풀풀 흩날리며 후줄근한 퇴근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쇳덩이같은 몸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포근한 이불속이 간절했지만 텅 빈 냉장고를 생각하니 마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들렀다.


양파 한 망만 사야지… 하고 들어섰지만 결국 습관대로 식재료를 잔뜩 사고 말았다. 특가세일하는 계란 한 판을 포기할 수 없었고, 모처럼 1+1 으로 판매되는 우유는 구매 필수. 그렇게 대파, 오렌지, 식빵, 삼겹살, 시금치 등이 추가된 장바구니는 어느새 가득 차고 넘쳤다. 사다 나르는 식재료의 양만큼 추가될 내 노동을 자꾸 깜빡깜빡하는 건 아무래도 불치병이 확실하다.


집까지 걸어서 10분 거리. 손톱 같은 달이 눈을 내리깔고 보내는 흐릿한 달빛이 쓸쓸하다. 장바구니 손잡이에 양손의 손가락과 손바닥이 점점 움푹 파였다. 흩뿌리는 빗방울 덕에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에 들러붙었다. 쓸어 넘길 손이 없어 가려움을 참고 걷는 내 마음에 괜한 심술이 솟구쳤다. 마트 출입구를 나선 지 3분도 채 되지 않아 거친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뒹굴거리며 저녁밥을 기다리고 있을 아들에게 아파트 앞 편의점으로 마중을 나오라며 전화를 걸었다. 내 목소리는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뚱하게 전화를 받는 아들에게 짜증이 날아갔다.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란함이 아파트 놀이터 담장을 넘어오는 길가. 자그마한 우산 속에 쏙 들어서 있는 연인. 힙한 음악이 팡팡~ 이어폰을 뚫고 나오는 줄도 모르고 그루브를 타는 학생. 손에 들고 있는 테이크아웃 잔 속 아이스아메리카노만큼이나 시원한 수다삼매경에 빠진 아가씨들. 나는 그들 옆을 묵묵히 지나쳤다.


발걸음은 처지고, 아파트 앞 편의점은 아득한데 양손에 들린 장바구니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욱신거리는 곳이 두 손인지 마음인지 혼동되기 시작한다. 습기에 잠식당한 안경너머 세상이 희뿌연 달빛 속으로 가라앉는 거리를 걷는 그 순간의 나는… 점점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작아졌다. '나'라는 존재가 스멀스멀 소멸되는 꼬라지가 깊은 한숨을 부른다.


고작 10여분 거리의 가로수 길이 빗방울과 함께 떨어진 낙엽으로 얼룩덜룩 지저분하고 멀기만 하다. 꾹 다문 입으로 살아내는 어제와 같은 오늘이, 오늘과 같을 내일이, 그 순간이 나는 그렇게 문득 서글펐다. 슬리퍼를 찍찍 끌며 편의점 앞으로 나온 아들이 괜한 불똥을 맞는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아들은 꾀죄죄한 아줌마의 주름진 눈가에 그렁거리던 눈물을 봤는지도…, 아니 못 본 체 한건지도 모를 중립기어 꽉 땅겨 올린듯한 얼굴로 내 짐을 받아 든다.

"아 화장실에 있었어… 내가 다 들게 이리 줘요."

마음이 시큰하니 궁색해진다. 이런 날은 눅눅한 날씨 탓을 할 밖에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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