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by 느닷

조리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한 둘째 아들의 꿈은 요리사다. 조리사 자격증이 있으면 고등학교 원서접수할 때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아들은 중3 때 급하게 양식조리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자격증 필기시험을 치던 날. 나는 수험표를 출력해서 아들에게 건네며 시험 장소와 시간, 준비물을 꼼꼼히 읽고 잘 체크하라고 일러 주었다. 처음 치는 자격시험도 아니고, 뭐든 알아서 잘하는 녀석이기에 나는 수험표를 자세히 읽어 보지는 않았다.


"엄마, 시험장은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00 시험장이고, 시험은 오후 2시예요"

나는 혹시 모르니 일찍 가서 기다리자며 이른 점심을 먹고 아들을 차에 태워 시험장에 도착했다.

"신분증 챙겼지? 좋아. 완벽해!"

그때 시간이 1시.


아들은 주차장에서 문제집을 한 번 더 훑으며 30분 정도 여유를 부렸다.

"아들~ 이제 슬슬 시험장에 들어가자~ 긴장하지 말고, 파이팅~!"

아들은 나름 열심히 준비했던 만큼 당당한 걸음으로 시험장을 향했다. 나는 차에 앉은 채로 합격하고 돌아올 아들을 상상하며 운전석을 뒤로 눕히고 편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5분도 채 되지 않아 아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주자장에 나타났다! 왜??? 느낌이 싸했다. 나는 놀란 토끼눈으로 아들을 살폈다.


"엄마.... 시험 시간이 2시가 아니라 1시래요.... 벌써 시험이 거의 끝났어요..."

맙소사...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문이 막히고 귀 끝이 화끈거렸다. 그럴 리가??

"수험표 이리 줘봐!!!"

수험표를 건네는 아들의 손이 덜덜 떨고 있었지만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장소 - 00 시험장
시간 - 13:00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예상 시나리오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시험시간은 정확히 오후 1시. 아... 내가 직접 확인했어야 했는데~! 도착해서 바로 시험장에만 들어갔어도....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아직 시험이 끝난 건 아니니까 들여보내 달라고 감독관에게 부탁해 보자! 이대로 포기할 순 없잖아?! 사정을 잘 말하면 시험을 치게 해 줄지도 몰라! 뭐 해 어서 따라와~!"

한 손에 수험표를 들고 다짜고짜 시험장으로 향하는 나를 아들이 막아섰다.

"벌써 다 해봤어요~ 입실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절대 안 된대요...."

너무나 명백한 실수 앞에서 도통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순간 깊은 한숨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 나는 왜 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직접 수험표를 읽어 보지 않았을까? 녀석은 왜 이 중요한 부분을 대충 봤을까? 어떻게 '13:00'을 2시로 읽을 수 있단 말인가? 다음 필기시험은 한참 뒤에 있는데 실기시험은 언제 치른단 말인가... 다다다 따져 묻는 내게 아들이 되려 더 화를 내며 동동거린다.

"아 몰라요! 몰라! 내가 일부러 그랬냐고요! 엄마도 같이 놓쳤잖아요!" 속상한 마음에 서로를 탓해버렸다.


아들은 끝내 눈물을 툭툭 떨구었다. 당최 믿고 싶지 않은 사건 앞에서 자책과 절망을 했다. 자신은 정말 구제불능인 것 같다며, 바보라는 둥, 자기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둥... 엉엉 울어버리는 커다란 중3 앞에서 부지불식간에 같이 화를 내버린 나는 어리석은 엄마가 되어있었다. 아 진짜... 나는 언제 엄마다운 엄마가 될 건지...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품에 안았다.

"괜찮아...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다 괜찮아... 화내서 미안해... 그래도 오늘 놓친 게 수능시험이나, 입사시험이 아니었기에 얼마나 다행이야~ 앞으로 네 인생에 무수히 많은 시험들이 있을 건데 이번에 작은 시험으로 큰 교훈 잘 얻었다! "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사람의 평정심을 빼앗아 가는지 겪을 때마다 놀랍다. 감정의 파도가 갑자기 요동치며 나를 덮치면 생각은 느려지고 본능은 앞선다. 덕분에 매번 실수투성이다. 상황을 알아차리고 생각을 앞세우려면 평소에 감정을 잘 들여다보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아들은 그 뒤에 접수한 양식조리사 필기시험 수험표에 빨간 동그라미를 잔뜩 그어서 거울 앞에 붙여두고 시험을 준비했다. 자격증 시험은 뒤늦게 합격했지만 가산점을 받기에는 늦어버렸다. 여러모로 준비가 미흡했던 조리고등학교 진학은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동안 주눅 든 아들의 어깨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조금씩 펴졌다.


부모로서 그 시간들을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서툰 감정의 변주와 미흡한 진학준비에 따른 결과는 많은 후회와 좌절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 반성의 시간은 아들의 100년 인생에서 한 점에 불과하다. 대신 다음 더 큰 시험을 준비할 때, 더 큰 감정의 파도가 일렁일 때 우리는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연습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한고비 한고비 함께 넘기며 엄마가 되고, 어른이 되는 건가 보다.








분노

귀여운 파리 한 마리가 유유히 마당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날아든다. 이리저리 구경하던 파리는 순식간에 청소기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파리는 처음에 이곳도 나름 지낼만한 곳이라며 나갈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다 곧 현실을 받아들이고는 신께 탈출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리며 타협을 시도한다. 아무 소용이 없자 분노하다가 지친 파리는, 이제 결코 나갈 수 없을 것이라며 절망한다. 결국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탈출에 성공한다.


절망

이 그림책은 우리가 슬픈 일을 겪을 때 경험하게 되는 감정의 5단계 변화를

[ 부정 -> 타협 -> 분노 -> 절망 -> 수용 ]

이해하기 쉽게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일상 속에서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면 쉽게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을 작년에 읽었더라면 나는 조금 더 현명한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하여간 언제고 다시 들이닥칠 수 있는 감정의 파도에 대비해서 감정의 5단 변신을 꼭 기억하자.


청소기에 갇힌 파리 한 마리 / 멜라니 와트 / 여유당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