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서관은 전체 장서의 7%에 해당하는 도서를 한 번에 폐기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 '7%'라는 숫자가 정해진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상대적인 숫자임은 분명하다. 신생 학교의 도서관은 장서량도 적은데다 모두 새책이다 보니 7%가 큰 숫자이다. 반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의 도서관은 50%를 다 도려내도 폐기할 책이 그득그득한 경우가 많다.
"아니 이렇게 많이~! 이 책들은 멀쩡한데 왜 버리는 거예요?"
"아… 이게 벌써 2009년에 출간된 책이라 맞춤법도, 과학정보도 많아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올 컬러로 개정판이 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래도 이렇게 멀쩡한데 너무 아깝잖아요! 책은 '장식'의 역할도 할 수 있는거 아니겠어요? 복도에 두면 보기 좋겠구먼!"
"아…. 사실 3년 전에 폐기처리 되었던 책인데 그동안 별관에서 장식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마저도 서가가 부족해서요~."
"그럼 버리지 말고 누구 필요한 사람 없는지 알아보고 나눠줍시다! 응? 알아보세요~"
교장선생님은 쉽게 물러서지 않으셨다.
'반짝거리는 새 책도 도통 안 봐서 곤란한 요즘인데 이 빛바랜 책을 어떤 어린이가 펼치려 할까요? 그런 어린이 찾아내면 낡은 전집이 아니라 상을 줘야….'
물론 나는 직장생활을 오래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므로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폐기업무는 종종 관리자의 방침에 따라 축소되거나 보류되고, 취소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 관장도 뭣도 아닌 일개 사서의 의견보다 관리자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곳이 학교도서관이다.
도서관의 유용함을 '장서량'으로 측정하는 방법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의 모든 출판물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납본도서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45년에 개관한 국립중앙도서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1300만권의 장서량은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자료들의 존재를 약속하는 든든한 숫자이다. 영국에서 두번째로 큰 보들리안 도서관은 1610년부터 납본 도서관으로 지정되어 영국 내에서 출간되는 모든 출판물을 의무적으로 보관하고 있다. 현재 1200만권 이상의 장서와 매년 추가되는 책을 비치하기 위해 해마다 5km의 소장공간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교실 한, 두 칸 정도 규모의 소형 학교도서관이 정상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장서량은 1만 5천권에서 2만권 안팎이다. 이 좁은 공간에 오래된 책을 오래오래 보관했다가는 몇 년 안에 포화상태가 되어버린다. 옷은 많은데 정작 입을 옷은 안보이는 옷장처럼 읽히지 않는 옛날 책들이 신간 마저 숨겨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어렵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한 과학만화 전집은 이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도서관 한켠으로 밀려났다. 당시에는 이색적인 구성과 주제들로 인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이를 능가하는 더 좋은 (그림이나 구성 등이 요즘 아이들의 구미에 잘 맞고 최신 정보를 담고 있는) 과학책이 많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되었다고 다 폐기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간혹 절판되어서 더 이상 구할 수도 없지만 소장가치가 높은 명작도 많고, 아무리 낡아도 독자들이 꾸준히 찾는 책도 많다. 그래서 폐기할 책을 고르는 일은 사서에게도 쉽지 않은 업무이다. 특히 나처럼 ‘버리기’를 잘 못하는 사람은 괴롭기가 이만 저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폐기를 자꾸 미루면 장서량이야 늘겠지만 아이들의 눈높이를 반영하지 못하는 구닥다리 책들 틈에서 신간도서가 숨바꼭질을 하게 된다. 학교도서관은 공간과 관리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구색의 대형마트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편의점의 간결한 품목과 깔끔한 진열, 빠른 신상 업데이트를 통한 최신 트렌드 반영과 같은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곳이다. 한때 인기가 많았더라도, 한때 비싼 몸값을 자랑했더라도 낡았거나, 오래되서 맞춤법이나 내용이 맞지 않는다면 새 책에게 자리를 내어줘야만 한다.
문제는 사서가 없는 학교다. 신간 구매는 필수업무이지만 폐기는 필수업무도 아닌데다 관리자조차 싫어하는 업무이다 보니 무한정 다음 담당자에게 넘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장서점검을 통해 분실, 파손된 책도 함께 걸러내면서 폐기업무를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데 폭탄돌리기처럼 마냥 미루다 보면 결국 어느 열정터진 일반교사가 초대형 폭탄을 떠 안게 되는날이 오고야 만다. 도서관이 녹슨 자전거처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효과까지 패키지상품이다. 이쯤되면 2000년대 이전에 출판된 고문서급 책, 전산에만 존재하는 분실된 책 등을 추려내는데 많은 인력과 예산을 추가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현재 수많은 학교 도서관이 폭탄돌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페기'업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