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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대치동?
학벌이 중요한 시대는 끝났다.

by 느닷

“선생님 오늘은 언제 퇴근하세요?”

오늘도 마지막까지 도서관을 지키고 있는 주영이는 2년째 나와 함께 퇴근하고 있는 VVIP이용자다. 주영이는 내가 늦게 퇴근할수록 도서관에 더 오래 있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

“선생님 ‘L의 운동화’ 구해주실 수 있어요?”

“무슨 책인데?”

“잡지에서 소개하는걸 봤는데 읽어보고 싶어서요. 어른 책이긴 한데… 이 책 6학년들에게 추천해 주면 좋겠어요. 6학년때 이한열 열사에 대해서 배우잖아요~ 이한열 열사가 신었던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을 다룬 책인데 읽다보면….”

“알았다 알았어! 구해줄게~ 그치만 다른 6학년들에게 추천하기엔 무리야~”

주영이와 책 이야기를 시작하면 10분은 그냥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이미 퇴근시간을 넘긴 나는 얼른 말을 잘랐다. 주영이는 마치 자신은 6학년이 아니라는듯이 ‘L의 운동화’에서 6학년 아이들에게 교과내용과 연계해서 가르쳐 줄만한 내용을 줄줄이 읇었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모든 분야의 책을 두루 즐기는 주영이는 서류상 6학년일 뿐 독서로 셀프월반을 한지 오래전이다.


“친구들은 다 학원 가는데 너는 심심하지 않아?”

“안심심해요. 교실에서 방과후 수업 기다리는 애들하고 놀거나, 집에서 놀거나, 도서관에서 놀면 되거든요.”

“집에서는 뭐하는데?”

“책읽어요.”

“도서관에서도 책 읽잖아. 그게 노는거야?”

“네~ 아, 가끔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들어요.”


주영이는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보며 그림을 배웠다. 매년 주영이가 제출하는 ‘나만의 책 만들기’공모전 작품의 표지 그림은 독보적이다. 물론 내용도 재미있어서 해마다 교내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작가님이다. 요즘에는 다음 작품의 자료조사를 위해 암석에 관한 책을 두루 읽고 있다. 주영이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손을 빌려야 하는 순간에 부탁을 하면 마치 보조교사처럼 척하니 적절한 도움을 보탠다.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법이 없다. 주영이는 재주가 너무 많아서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가 줄을 서있는 덕분에 아쉽게도 도서부에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다. 주영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아이다. 하고싶고, 되고싶은 것을 향해 책과 함께 걷는법을 일찍이 터득했다. 주영이의 꿈은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나는 주영이가 당연히 영화감독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유명해지더라도 글빛누리도서관에서 나와 함께 책 읽었던 시간을 잊지 않기로 미리 약속했다.


유발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 따르면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혁명이라는 쌍두마차가 끌어당기는 변화의 속도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기술적 파괴와 생태학적 붕괴가 합쳐져서 젊은 세대의 삶은 현상 유지만 해도 다행일지 모른다고까지 말한다. 심지어 기술 혁명은 조만간 수십억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내고, 막대한 규모의 무용계급을 만들어낼지 모르며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알고리즘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조만간은 2050년. 그리 먼 미래라고 할 수 없다.


2050년이면 주영이 같은 학령기의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쯤이다. 우리 아이들은 도저히 예측하기 어렵고, 지금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배움은 지금의 어른들이 배웠던 것과 같은 것일리가 없다. 이를 국.수.사.과 성적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배움은 무엇일까? ‘최재천의 공부’에서 ‘사회의 고통은 과목별로 오지 않는데 아직도 교실에서는 20세기 방식으로 과목별로 가르친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교실과 학년의 경계를 벗어난 주영이는 도서관에서 모든 분양의 책을 섭렵하며 과목을 뛰어넘는 융합적 공부를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메가스터디 대표 손주은회장이 인터뷰한 ‘아직도 대치동? 학벌이 중요한 시대는 끝났다. 자녀교육에 돈 쓰지 마라’는 제목의 영상이 73만뷰나 조회되었다. 손주은 회장은 사교육으로 자녀의 미래 준비를 위임하는 방법은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제일 간단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사업을 폄하하면서까지 사교육 몰빵현상을 염려한것이다. 부족한 살림에 쪼들려가며 마련한 돈을 사교육비로 쓰고 있다면 이러한 표현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사교육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그래도 인정받는 인 서울, 그나마 취업 잘되는 의과대에 가기 위한 경쟁이 현재도 치열하지만 그것도 1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현재 출생률을 확인해 보면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면 서울권 대학조차 정원미달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목적으로 갈고닦은 학습은 사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유용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은 부모가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대화를 나누고 좀 더 상위의 사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가 스스로 해답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학원셔틀보다 훨씬 번거롭고 부모가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맞다. 바빠 죽겠는데 대화와 성장이라니! 학원비 카드 결제가 훨씬 간편하긴 하다. 철학적 사유를 하고, 고차원적 사고를 끌어내고, 자기 효능감을 반복하며 자존감을 키우고… 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가성비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함께 읽기와 이야기 나누기'. 겸해서 '쓰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


올해도 어김없이 한글날을 기념하는 책만들기 공모전을 시작했다. 도서부의 재주꾼들이 꼬마작가들을 불러들일만한 멋진 포스터를 만드는 것으로 행사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상품에 눈이멀어 창작의 고통속에 발을 들이지만 고민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끝없이 질문하고 상상하며 즐긴다.

“아… 무슨내용을 쓰지? 선생님 그림만 그리면 안되요? 몇장 정도 써야 하나요?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에 대한 사전을 만들어도 되나요? 주인공이 좀비여도 괜찮나요? 다이어트에 성공한 야채주인공 어때요? 저장기간이 제일 긴 채소는 뭘까요? 이 책이랑 비슷하게 써도 되나요? 깡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으로 좀 참고할거 있을까요? 고래에 관한 책 좀 찾아주세요.” 꼬마작가님들의 질문에 일일이 응대하다 보면 도서관이 마비될 지경이다.


아이들은 원고를 준비하고, 책에 옮겨적는 시간동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도서관을 휘저으며 자료를 조사하고, 친구들과 아이디어를 나눈다. 그림을 그렸다 구겨 버리기를 반복하며 창작의 고통을 즐긴다. 서로 글을 바꿔 보면서 낄낄거리다 해가 저문다. 고작 몇페이지 짜리 책 하나 만드는 일이지만 아이들 안에서 과목의 경계없는 자기주도적 배움이 일어난다. 그렇게 입 무겁던 고학년들도 멋진 작품을 위해 다양한 질문을 쏟아낸다.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속에서 성취감을 경험한 아이들이 다음 해에 또 기꺼이 참여하러 온다.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고, 상품을 받는 한달여간의 기간동안 아이들은 훌쩍 성장한다.


20년 가까이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 친한 영어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 있다. 자신이 만약 육아시기에 독서모임을 병행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분명히 망쳤을 것이라고. 더 많은 잔소리와 높은 기대치에 따른 비난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라고. 모임을 통해 다양한 책을 읽으며 생각을 공유하고 다듬으며 세상을 이해하는 눈을 키우고 주변을 이해하는 마음을 내었던 덕분에 두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제 몫을 하는 성인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의견에 격하게 동의하는 바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거나 교육의 한계에 대한 질문에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고민해 볼 뿐이다. 혹시 함께 고민해 볼 마음이 생겼다면 내일은 동네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러 지역 독서 모임을 알아보는 것으로 고민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아, 온라인 모임도 다양하다!







밀레니얼의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큰그림을 그리는 능력'이며, 그림을 그리는 역량의 핵심은 그리고 싶은 그림의 종자, 핵심 개념과 관점을 확보하고 그를 중심으로 주변을 재구성하는 역량이다. 이것은 다차원 그물망 구조로 지식과 정보를 다룰 줄 아는 포노사피엔스 학습법에 가장 적합한 사고방식이다. 유발하라리는 '디지털 네트워크 지식과 정보 환경에서 학교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더 많은 정보를 주입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학교가 포노사피엔스들에게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지식과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경중을 가릴 줄 알며,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자신의 문제의식에 따라 자신의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려내는 역량을 키우는 일'이리고 강조한다. 포노사피엔스 학교의 탄생 / 최승복 / 공명 / 1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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