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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의 오해

by 느닷


자유로운 재즈 (brunch.co.kr) <- 이 글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난생처음 학교라는 곳으로 첫 출근 하던 날. 새벽 일찍 일어나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외출준비에 공을 들인다음 일찌감치 출근을 했었다. 당시 교무주임이었던 K는 츄리닝 차림으로 나를 교직원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행정실에서 일하는 분들과는 시답잖은 농담으로 인사를 건네며 새로 온 사서라고 나를 소개해 주었다. '교무주임 선생님'이라는 직책이 어떤 역할인지 전혀 몰랐던 나는 K에 대해 특별히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매일 학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도서관에도 한 번씩 들러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가는 그를 보며 시간 많고 별 할 일 없는 그런 한량 같은 직원인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다.


근무 2년 차가 될 때쯤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상황을 다 꿰차고 컨트롤 타워 같은 역할을 하는 중간리더가 교무주임이라는 것을. 부끄럽지만... 사서업무에 적응하기 바빠서 도서관에 콕 박혀 지내다 보니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정말 너무 몰랐던 것이다.


K는 시간이 많아 학교를 기웃거렸던 것이 아니다. 한량이라서가 아니라 체육교과 전담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츄리닝 차림이었던 것이다. K는 학교 살림과 행사들을 조율하는 바쁜 와중에도 초짜 사서를 위해 짬을 내어 굳이 도서관에 들러 여러모로 조언해 주고 챙겨주었던 것이다! 학교근무에 대해 그야말로 일자무식이었던 나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K를 오랜 시간 한량선생님으로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됐지만 K는 이미 전근을 떠난 뒤였다.






얼마 전부터 주 1회 도서관 학급방문을 시작한 반이 있다. 도서관 방문 첫날 담임선생님은 ' 매주 선생님이 정해주는 분류번호의 책만 읽어야 한다'라고 선포를 했다. 싫다고 투정하는 아이들의 의견에 엄한 얼굴로 '골고루 읽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하는 담임 선생님의 대답은 아이들을 이해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나 역시 책을 골고루 읽히는 게 영원한 숙원사업이지만 이렇게 강경하게 끌고 가는 방식에는 솔직히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나는 사서로서 가지고 있던 내 짧은 경험치 안에 없는 것은 오답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거만함을 떨었는지도 모르겠다.


담임선생님은 다음 주에 '주제별 빙고판'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셨다. 철학, 종교, 문학, 그림책, 동시, 역사, 잡지 등 16개의 다양한 주제가 칸마다 적혀있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하되 도장 깨기 하듯이 칸을 채워가며 다양하게 읽으면서 3줄 빙고를 완성하는 것이 1학기 목표라고 했다. 지난주 학생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담임선생님은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빙고라는 타협점을 찾아내어 수업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책을 골라 읽으면서도 선생님이 바라던 대로 골고루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이렇게 독서교육에 진심 어린 고민을 하는 선생님이었다니! 담임선생님의 고민을 들여다보고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낯설다는 둥 이해가 안된다는 둥 마음대로 선을 그어댄 나는 얼마나 옹졸했는가! 아무래도 K선생님 때 보다 더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그때는 차라리 초보라 뭘 몰랐다고 변명이나 할 수 있었지만, 이번 실수의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이다.






담임선생님이 들고 온 '주제별 빙고판'은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진작 함께 의논하지 못했던 쫌생이 같은 마음을 들킬세라 조금만 변형하면 전 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좋은 독서교육 행사도 진행할 수 있겠다며 호들갑스레 박수를 쳤다. 담임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이걸 찾아내느라 힘들었다고 소심하게 고백하셨다.


작디작은 도서관을 뺑뺑이 돌며 일하는 나의 시야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 같을 수밖에 없음을 자꾸 깜빡한다. 하지만 별 수 있는가? 인정하기가 싫지만 나는 내일 또 어리석을지 모른다. 그러니 틀린 것을 발견할 때마다 각도를 수정해 나가는 수밖에. 이번 방학 행사는 '주제별 빙고판' 3줄 채우기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 곰출판 / 202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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