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톡!900 잉여시간 제작소
시작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모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시작되었다. 학생 독서동아리 '책톡!900'이라는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이 직접 선정한 책을 미리 읽고 도서관에 모여서 책수다를 나누는 90분의 시간이 10번만 모이면 900분이 된다는 뜻에서 '책톡!900'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동아리의 특징은 세 가지이다.
1. 자유로운 선택이 필수이다. 색 선정, 책수다를 운영하는 방식, 운영기록, 간식 선택... 모두 다 학생들이 의논해서 결정한다.
2. 넉넉한 예산으로 지원이 푸짐하다. 책도 사주고, 간식도 사주고, 서점도 데려가주고, 방과 후에 시간과 장소도 내어준다. 담당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이다.
3. 교사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 줄 뿐 운영에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벌써 4년째 이어오고 있는 5학년 대상 독서동아리로 학부모님과 학생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은 프로그램이기에 올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저학년들은 5학년이 되면 꼭 이 동아리에 가입하겠노라 다짐하며 구경하고, 봉사자 어머니들은 내 아이를 꼭 저 동아리에 보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책톡활동을 구경하신다. 안타까운 건 막상 모집을 해 보면 희망자의 90%가 꽉 찬 학원스케줄 때문에 접수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올해 역시 희망자는 많았지만 접수 가능한 학생은 드물었다. 다행히 열심히 홍보한 끝에 접수가능 인원을 꽉 채워 모집이 완료되었다. 사전모임에서 아이들의 열띤 경합 끝에 선정된 책은 '취미는 악플, 특기는 막말 / 김이환 외 / 생각학교 출판'. 학교폭력에 관한 책인데 5개의 다른 이야기들이 묶여있는 구성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이 겪을법한 생활밀착형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책을 미리 읽고 도서관에 모여서 지난번에 투표로 결정한 간식(햄버거와 콜라)을 먹으며 책수다를 펼쳤다. 첫날이라 아직 대화가 서먹했는데 햄버거가 도착하자 분위기가 금세 화기애애 해 졌다. 독서모임에서 간식은 책 보다 더 중요한 필수품이다!
오늘 반장을 맡은 학생이 '제일 좋았던 문장 돌아가며 말해보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진행한다. 국어 시간에 배웠는지... 제법이다. 책 수다 중에 누군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나 고민을 누구에게 털어놓나?' 하는 물음을 던졌는데 아이들의 대답이 흥미진진했다. 베프 한 명에게만 말한다. 엄마에게만 말한다. 아빠에게만 말한다는 없었고 아빠에게도 말한다는 학생은 한 명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친구도 두 명이나 있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엄마는 내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가 ~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니면 네가 ~를 잘못한 거 아니야?"라며 남의 편을 먼저 드는 엄마의 훈수가 서운하기 때문에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낮다고 한다. 반대로 엄마에게만 말한다는 친구는 엄마는 절대 소문 안 내고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아빠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아빠는 집에 잘 없거나 아침에 잠깐 보거나 며칠에 한번 보기 때문에 대화할 시간이 없고, 그래서 심각한 이야기 아니면 잘 말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혹은 아빠는 골프 치거나 술 마시면서 소문을 다 내버리기 때문에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아이도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말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소문이 나면 더 골치 아프기 때문에 그냥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란다.
아이들은 보안유지를 제일 염려하는 듯했다. 믿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아이의 눈은 슬퍼 보였다. 언뜻 책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책은 거들뿐이다. 책수다를 나누다 보면 항상 각자 다른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며 공감하고 이해하는 수순으로 대화는 흘러간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다양한 다름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책톡 10회기를 마칠 때쯤이면 아이들은 놀랄 만큼 훌쩍 성장해 있다. 게임이나 시험, 공부 같은 주제 말고 자신들의 삶과 닫아있는 고민을 진지하게 나누고 듣는 경험을 처음 해 본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하루는 너무 바쁘다. 맛있는 간식 먹으며 책수다 떠는 900분. 이때나마 잠시 학원이나 숙제는 잊고 '나'와 '너'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숨통이 틔이는 듯 진지하게 자신들의 속내를 토해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하다.
고작 900분의 시간으로도 내적 성장을 이뤄내는 아이들의 신기한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잉여시간 필요하다. 스스로 질문하고 서로 답하는 중에 배움이 일어나는 책수다 동아리. 교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게 동아리 지도교사가 지켜야 할 규칙이다. 어른은 시간과 공간을 아이들에게 허락해 줄 뿐이다. 정말 간단한 프로그램인데... 왜 학교에서 예산을 집행하고 부모님께 허락받아 가며 요란하게 진행을 해야만 가능한 것일까? 매년 내게 허락되는 인원은 단 8명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일상에서 이런 시간을 많이 많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