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주인은? 학생!
매년 가을 '독서의 달'이 되면 스스로 읽고, 쓰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나만의 책 만들기' 공모전을 연다. 주제, 장르, 분량 모두 자율이다. 책의 형태나 소재에도 제한이 없지만 사실 아이들은 작년에 선배들이 했던 형태를 따라 하는 편이다. A4용지 여러 장을 반으로 접고 제일 앞장에 빳빳한 마분지를 반 잘라 표지삼아 붙이면 제일 인기 있는 책의 형태가 갖춰진다. 꼬마 작가님들은 소설, 수필, 일기, 사전, 만화, 동시, 잡지 등 정말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시도하는데 소재는 보통 학교나 학원, 가정에서 겪은 일들이 대부분이다.
올해로 벌써 4회를 맞이하는 이 공모전은 이제 도서관에서 가장 큰 연례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예비 꼬마작가님들은 도서관 복도에 있는 '꼬마작가' 코너에 전시되어 있는 작년 출품작들을 구경하며 올해 어떤 작품을 내면 좋을지 미리 구상하곤 한다.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구성으로 팀을 짜서 전략을 세우기도 하고, 선배들의 작품을 비평하며 틈틈이 습작을 하기도 한다.
비록 종이 몇 장 접어서 손으로 그리고 쓴 책이지만 전교생을 독자로 두는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기에 공모전 출품은 아이들에게 제법 명예로운 일이다. 공모전에 전시 작품으로 선정이 되면 2주간 본관 1층에 전시되고, 이후에도 본인이 희망할 경우 내년 공모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 년 동안 도서관 복도에 있는 '꼬마작가' 코너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
딱히 등수를 매기지는 않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에 하트 스티커를 선물하는 독자들 덕분에 해마다 최고 인기작품이 한, 둘 지목되곤 한다. 꼬마작가님들은 자신의 작품이 제일 인기를 끌기 바라며 전시장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홍보하는 등 독자와의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기 작품의 첫 번째 조건은 보통 매력적인 표지이다. 표지가 눈길을 끌지 못하면 내용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스타작가가 되지는 못한다.
'꼬마작가' 코너의 책은 초등학생 작품답게 대부분 글씨도 삐뚤빼뚤하고, 맞춤법도 틀린 게 많지만 학생들에게는 늘 인기만점이다. 자신이 책을 만들면 이 정도는 만들 수 있겠다는 둥, 이 언니는 정말 실력자라는 둥, 이 책을 참고해서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둥, 누구보다 누구 작품이 어떤 이유에서 더 훌륭하다는 평가까지... 글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틈틈이 꼬마작가 코너 앞에서 진지하게 꿈을 키운다. 그 어떤 일반 출판물에서도 볼 수 없는 자신들의 내밀한 날것의 메시지를 즐기고 감상하는 것이리라.
솜씨 좋은 삽화와 흥미진진한 스토리, 눈길을 잡아끄는 제목 등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의 수준이 높아지고 출품작이 많아졌다. 덕분에 학부모 도서도우미와, 도서부 학생들의 공모전 심사가 매년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을 보며 공모전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래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꼬마작가님들의 작품을 잘 보관하고 전시하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사건은 1교시 시작 전 아침활동 시간에 벌어졌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수업을 시작하는 9시 이전에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기 위해서 북새통을 이루는 바쁜 시간이다. 그때 5학년 학생 두 명이 반으로 두 동강이 나버린 전시 작품을 손에 들고 뛰어들어왔다.
"선생님~~ 저기 1학년들이 '꼬마작가' 코너에 책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이거 제가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거예요!!"
이렇게 작정하고 작품을 훼손하는 일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염려해 본 적이 없기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일제히 학생 손에 들려진 책 조각과 얼음이 되어 서있는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란스럽던 도서관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겨우 일그러진 입을 열었다.
"누가 이런.... 왜..."
"1학년이 찢었어요!"
"그 학생 이름 제가 알아요!"
"6학년 신 00 이가 이 책은 재미없으니까 찢어도 된다고 옆에서 부추겼어요!"
"1학년 박 00이 찢어진걸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제가 안된다고 말했는데 벌써 찢어버렸어요!"
복도에서 지켜보던 성난 아이들의 제보가 빗발쳤다.
찢어진 책의 제목은 핏빛으로 붉게 뚝뚝 흐르는 글씨로 '무서운 이야기'였다. 문제는 표지만 무섭고 내용은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학생 세 명이서 나는 하나도 안 무섭더라! 나는 재미도 없더라~ 그럼 읽을 필요도 없네! 그래 찢어버려도 된다! 그럼 진짜 찢을까? 그래 찢어봐라! 이따위 허세 가득한 대화 끝에 정말로 찢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기까지!
"선생님 6학년 신 00 몇 반인지 알아요! 제가 데리고 올게요!"
"선생님 제가 김 00이랑 박 00 데리고 왔어요!"
내가 어찌하기도 전에 벌써 도서부 학생들이 도망간 허세남 세명을 소환조치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전시된 작품들의 유일성과 소중함을 알고 있기에, 작품을 함부로 다룬 세 학생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표현했다. 물론 내가 경위를 묻고, 엄중히 야단을 치고, 작품의 주인에게 사과를 시키는 반성의 절차를 밟았지만 그전에 분노하는 여론의 따가움을 맛본 허세남들은 충분히 주눅 들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책의 작가인 6학년 학생이 '다시 만들면 되요~'라며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는 사실.
사서인 나보다 더 화내고, 기분 나빠하는 아이들을 보니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였다. 아이들은 어느새 도서관의 모든 책과, 작품과, 행사와 규칙들을 주도하고 있었다. 책이 찢어진 건 정말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이들이 도서관을 얼마나 애정하는지 엿보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 도서관은 완벽하게 학생들이 주인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