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

파랑새의 손을 놓치지 마세요

by 느닷

세상은 늘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존재하지만 보기에 따라, 내 기분에 따라 적막한 무채색이기도 했다가 화려한 무지개색으로 반짝거리기도 한다. 세상은 항상 코앞에 있어서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 보면 내가 서 있던 곳의 모습이 뒤늦게 보이곤 한다. 그런데 가끔은 내 말속에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비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한참 잘 나갈 땐 말이야~, 예전엔 이깟거 별것도 아니었는데, 걔 옛날에 나랑 친했거든~."

과거를 노래하는 말이다. 과거의 영광이라는 세상에 갇히면 현재를 살지 못하게 된다.

"그냥 하던 거나 하지, 뭐 하러 쓸데없이... 내까짓게 무슨... 어차피 안될 거야. 그건 특별한 사람들 이야기고~"

도전을 비웃으며 현재에 안주하는 말이다. 나를 무기력하게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에너지까지 갉아먹는 뱀파이어의 삶을 살게 된다.

또는 스스로 만든 벽 앞에서 정체 모를 두려움에 지레 겁먹고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삶도 있다.

"욕심은 위험한 거야."


나에게는 '자립'이라는 숙제가 과거의 영광과 무기력, 두려움의 3종세트로 점철된 한계지점이었다. 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독립해서 오롯이 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바로 서기. 그 불가능 해 보이는 높은 벽 앞에서 나는 울고 불고 떼쓰며 탓했었다. 스스로가 만든 벽 안에 자기를 가둔 사람은 앞 못 보는 장님과 같다. 장님은 보이지 않는 만큼 의심도 많다. 아름답고 감사하고 긍정적인 모든 것들을 의심하며 살던 그 시절의 나는 온통 잿빛인 세상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고양이야, 저 벽 너머에 가 본 적 있어?"
"아니. 벽 너머는 아무도 몰라. 너도 알려고 하지 마. 분명 위험할 거야"
"나는 빨간 벽 너머가 정말 궁금해."
"벽이 높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위험한 걸 막아놓은 거라구.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관둬."
"고양이야, 너는 벽 안에서 행복하니?"
"그럼~! 생쥐야, 너는 왜 모르니? 아무 일도 없이 안전한 것이 행복이야."


어머니는 당신이 못 배우고, 사회생활도 못해본 후회를 무의식적으로 자식들을 통해 대신 성취하고 싶어 하셨다. 그중에서도 특히 장녀인 나의 존재는 어머니에게 상징적이었다. 나의 성공은 곧 어머니의 성공이었고, 나의 실패는 곧 어머니의 실패였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 합격하면 어머니가 합격한 것처럼 으쓱해하셨고, 내가 취업시험에 떨어지면 당신이 떨어진 것처럼 상심하셨다. 나의 결혼은 어머니의 결혼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취향에 맞지 않던 예비사위는 적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는 단정하고 세련된 옷차림이어야 했고, 내 일거수일투족의 면면에 어머니의 스타일과 선택이 가미되어야 했다.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았지만 나는 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위해, 내 행복을 위해 세심히 살피고 참견하느라 걱정이 끊일 날 없는 어머니의 삶은 늘 피곤했다. 나 역시 숨이 막혔다. 내 취향과 내 선택은 내 것인지 어머니의 것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문득 알아챘다. 나는 어머니라는 벽을 넘어서야 하는구나. 어머니를 넘어선 내 삶을 오롯이 살아낼 때 어머니 역시 어머니만의 삶을 사시겠구나!


빨간 벽을 넘어 날아든 파랑새는 생쥐를 등에 태운채 빨간 벽 너머를 보여 주었다. 내가 홀로서기라는 드높은 벽 너머를 넘볼 수 있게 도와준 파랑새 같은 그림책의 세상에서 나는 어머니와 헤어지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 그림책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자물쇠 같은 존재다.





오늘의 브란치는 '빨간 벽 / 브리타 테켄트럽 / 봄봄' 그림책을 참고해서 만들었습니다. 브리타 테켄트럽은 제가 정말 애정하는 작가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브리타 테켄트럽의 다른 작품도 꼭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빨간 벽'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벽 없는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늙지 않을 거예요~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호랑이씨는 숲으로 가고 느닷씨는 바다로 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