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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닷 May 01. 2024

아르헨티나 까지 가서 찾아온 '나'

지난 2024년 2월. 지구 반대편 저 멀리 아르헨티나로 동료 선생님 두 명과 자유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어땠냐고요? 굉장했습니다! 미국 LA로, 칠레 산티아고로, 24시간 넘게 경유에 경유를 거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그곳은 생전처음 보는 빼곡한 밀림과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과수 폭포, 엘찰텐의 빙하, 파타고니아의 우람한 산맥, 강렬한 탱고... 모두 숨 쉴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스카이 다이빙, 프리다이빙, 동굴 스쿠버 다이빙, 나우엘우아피 래프팅, 피츠로이 트래킹, 모레노 빙하투어... 모든 체험들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가지 않았다면 결코 느껴볼 수 없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고기와 와인이 특히 싸고 품질이 좋은 나라여서 거의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의외로 유제품도 훌륭해서 생전 안 먹던 아이스크림과 치즈를 매일 먹었습니다. 대신 탄산을 즐기는 나라. 저녁식사는 8 시인 나라. 다양한 피부색과 체형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사는 화려하면서 순박한 나라. 무람없는 미소를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베푸는 나라. 아르헨티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답고 낯선 나라에서 대한민국 김규미라는 사람은 영어도, 스페인어도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덕분에 눈에 더 많은 것을 담을 수밖에 없었지요. 아름다운 천지연 폭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산으로 오르고 오르며 보고 또 봐도 끝없이 펼쳐져 있던 거대한 이과수 폭포와, 끝을 알 수 없던 엘칼라파테의 빙하, 빛나는 바릴로체 호수 앞에서 진정한 대자연을 만나 벅찬 감정에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왜 그런지 그 좋은 것들을 사랑하는 가족들 없이 홀로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내 인지능력을 넘어서는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한순간 하찮은 미물로 전락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집도, 일도 없는 나그네로서, 등에 멘 배낭하나와 손에 끄는 캐리어 하나가 전 재산인 가벼운 객으로서 사실 여행 내내 나는 무척이나 작고 무용한 존재였습니다. 꼬질꼬질 알량한 돈으로 겨우 만들어낸 시간을 대단한 능력인양 길바닥에 뿌려가며 남의 나라를 기웃거릴수록 나의 부족함은 하늘 아래 한 없이 까발려졌습니다. 고작 에어컨 바람 앞에서 고뿔에 호들 거리고, 찬 음식 며칠 먹었다고 배탈이 났습니다. 안 맞는 신발 신고 비탈길 좀 걸었다고 발바닥이 까져서 따가워도 연고 하나 내 손으로 사는 게 어려웠습니다. 좋아하는 과일 몇 개 사 먹고 싶어도 돈 계산이 서툴어 포기하기 일쑤였습니다. 시골길에서 와이파이가 꺼지면 화장실도 못 찾는 어린아이가 돼버렸습니다. 빡빡한 일정에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강행군을 하고 나면 함께 간 10살 젊은 동료들과 달리 유난히 코를 골고 이를 갈며 곯아떨어져 버리는 늙은이가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세상 모든 밥상을 사랑하는 내가 뜨끈한 라면 국물을 그리워하며 밥투정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른이 된 후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여행 곳곳에 숨어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자고 일어나면 천정부지로 오르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뭉치로 된 돈다발을 들고 다니는 나라였습니다. 혹시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봐 돈뭉치를 품에 꽁꽁 끌어안고, 휴대폰을 손목에 칭칭 감아 경계하며 걷는 내 앞을 지난가는 아르헨티나 인들은 사실 무탈히 일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새벽 일찍 가게문을 열고, 흥정을 하고, 밤에는 탱고를 추며 열심히 일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화려한 내 신발이 부끄러웠고, 흥청망청 노느라 정신없는 여행객들 속에서 같이 흔들리던 내 손에 와인잔도 함께 초라했습니다.

그렇게 3주간 아르헨티나, 브라질, 도미니카공화국 등 남미 여기저기를 헤매다 돌아왔습니다. 같이 갔던 훌륭한 동료 선생님 덕분에 큰 사고 없이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여행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여행지가 너무 멀었던 탓인지 돌아온 이곳에서 다시 만난 '내'가 생경해 한동안 일상이 멈칫거리곤 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한국의 '나'는 참 잘 살고 있었더라고요. 맨발, 맨몸으로 맨바닥에 내려서서 마치 처음 보듯 이곳의 '나'를 다시 만나며 새삼 감탄하고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엄마로서 필요한, 출근에 필요한, 동료로서 필요한 다양한 옷을 다시 하나하나 걸치며 내가 쓰던 수많은 가면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졌습니다. 3주간 깡그리 잊고 있던 나의 모습들이 신기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따뜻한 물을 마시며 일어나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꾸준히 운동하며 내 컨디션을 돌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손 닿는 곳 어디든 책이 널려있는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사귀환을 반겨주는 가족과 친구, 동료 등등 인복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일이 산더미 같이 많은 든든한 직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참 부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먼데까지 가서 기를 쓰며 보고 온 것들은 다 녹아 가슴에 스며지고 여행 후 내 손에 남은 알맹이는 일상을 잘 살고 있던 '나'였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일상이 숨 막혀 도망치듯 떠난 여행의 결말 치고는 참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내가 바라는 오늘의 점을 찍기 위해서 무한히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여행은 새삼 가르쳐 주었습니다. 혹시 어느 때이고 요즘이 너무 지겹다고, 지친다고 스스로에게 징징거리는 날이 다시 온다면 아르헨티나에서 물 한 병을 못 사서 텅 빈 거리를 홀로 걸었던 그 밤을 떠올리겠습니다.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던 눈부신 별들 아래에 서서 발 아프고, 춥고, 목마른 입 때문에 그 별에게 실컷 예쁘다 말해주지 못했던 파타고니아의 밤길을 생각하면 나는 가로등 불빛으로 창가가 훤한 내 책상을 사랑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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