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수영장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샤워를 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따가운 눈을 껌뻑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향기인데! 흔한 향수도 쓰지 않지만 유일하게 좋아하는 향이 있다. 꽃밭 향기. 꽃 말고 꽃밭 말이다. 향기의 주인은 뒤에서 꽃밭 향기 나는 바디워시로 샤워 중이던 어떤 아주머니. 이런 향을 파는구나~! 반가운 마음에 염치 불구하고 불쑥 그분 앞에 코를 들이대며 아침부터 민망한 웃음을 안겨 드리고 제품 이름을 받았다.
싹을 틔우고 쑤욱 자라나 어느 때고 자신의 때에 봉오리를 맺고 꽃을 펼치는 아름다운 생명들. 이름 모를 그들을 무던히 품고 있는 곳이 꽃밭이다. 혹은 화원? 그래서 꽃밭의 향기에는 그냥 한송이 꽃에는 없는 초록향이 담겨있다. 약동하는 에너지를 품은 초록빛 향기와 꽃들의 아름다움이 버무려지면 드디어 알록달록한 꽃밭 향기가 완성된다. 영원히 떡잎으로 머무는 생명은 없다. 영원히 꽃 피운 채로 머무는 생명도 없다. 그러니 피고 이지러지는 모든 시간은 신비롭다. 그 과정은 빨라도, 느려도, 예상 밖이어도 경이롭다.
6학년 채현이가 책 3권을 대출/반납대에 무심히 턱 올려놓는다. 내가 좋아하는 이꽃님 작가의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과 '달빛마신소녀'가 포함되어 있다. 아직 서로 낯이 선 학생이지만 한마디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꽃님 작가 책 정말 재미있지 않든~!?"
채현이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내비친다. 아이코.... 안 읽은 모양이다.
"아~ 바빴구나~? 괜찮아~ 다음에 읽으면 되지. 그런데 이 책은 인기가 많아서 다음에 또 기회가 쉽게 올지 모르겠다. 특히 이꽃님 작가님 책은 '죽이고 싶은 아이'와 함께 늘 대기하는 친구들이 줄을 서있는 책이라서 말이야~ 사실 나도 이 두 번째 책은 아직 못 읽어 봤거든. 첫 번째 책이 어떤 내용이었냐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해. 역대급 반전에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잊을 수가 없어. "
둑 터진 댐 마냥 두 권의 책에 대한 내 감상을 조잘조잘 나누자 채현이의 눈빛에 점점 아쉬움이 어른거렸다. 채현이의 손이 슬그머니 반납하려던 책 위로 다시 올라간다.
"제가요... 지난주 너무 바빠서 못 읽었거든요... 이거 그냥 다시 빌려가면 안돼요? 저 이번주에는 시간이 많을 것 같거든요~! 두권 다요!"
"아~ 선생님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특~~ 별이 일주일만 더 빌려줄게~ 다음 주에는 꼭 반납해야 한다~!"
채현이는 들어올 때랑 사뭇 다른 몸짓으로 두 권의 책을 가슴에 꼭 안고 폴짝거리며 돌아나갔다. 오늘도 아스라이 맺힌 꽃봉오리에 물 한 컵 부었다. 이번 주말에 채현이 생각에 꽃이 피겠구나~ 다음 주에는 꽃향기도 맡을 수 있겠구나~ 나는 언제고 꽃밭향기 맡기 위해 꽃에 물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