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에 도서관으로 달려오기(?) 꼴찌를 한 날 선우는 공기놀이 판에서도 연거푸 패배를 맛보았다. 도서관 색연필로 오밀조밀 신기한 로봇을 그려내는 친구들 옆에서 선우는 뾰로통해졌다. 한쪽눈이 사시인 탓에 특별한 안경을 쓴 선우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작정한 듯 목에 힘을 주고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친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심심한데 90단이나 써 볼까~?!"
"엥? 90단? 그게 뭐야?"
"와~ 90단도 몰라? 사서쌤~ 90단 할 줄 알아요?"
"글쎄에~~~ 90단이 뭐야? 선생님도 너무 궁금한데~? 조금만 설명 해 줄 수 있어?"
"히~ 엄청 쉬워요! 너희도 잘 봐~ 구구단의 9단에다가 0만 이렇게 붙이면 되는 거야. 그다음에는 이렇게 하면 2천까지도 넘어갈 수 있어~!"
2천이라는 큰 숫자에 눈이 똥그래진 아이들 몇몇이 관심을 보이며 모여든다.
선우는 친구들보다 달리기도 느리고, 그림도 예쁘게 못 그리지만 수학은 좀 한다. 어쩌면 선우에게 수학은 수학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와... 나는 아직 6단까지 밖에 모르는데~"
"그럼 6단으로 60단을 할 수 있어! 봐봐~"
은근 샘을 내면서도 궁금해하는 승찬이를 발견한 선우는 이제 신이 났다. 갑작스레 선우의 1분 과외가 시작된다.
"자, 6단을 썼지? 그 다음에는 이렇게~..., 알겠지? 자, 그럼 9단도 해봐. 그렇지~ 오~ 잘하네~"
"와... 신기하다! 나도 빨리 9단까지 외우고 싶다... 나도 쓰면서는 9단까지 할 수 있거든... 이렇게 맞지?"
2학년 두 아들의 깜짝 산수교실이 후끈후끈하다. 옆에서 구경하던 녀석들도 로봇그림을 팽개치고 너도나도 구구단 실력을 뽐내느라 정신이 없다.
"선생님 이면지 좀 더 주세요~"
"아 그래그래!"
세상 시끄럽던 개구쟁이 두 녀석이 갑자기 도서관을 산수교실로 만들었다. 나는 6단밖에 못 외운다던 승찬이 옆에 구구단 그림책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구구단 뽐내기가 금세 시들해 지자 아이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다시 삼삼오오 흩어졌다. 승찬이는 무심한 듯 구구단 그림책을 펼쳐들었다. 선우는 오늘도 한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장기로 자기 효능감을 유감없이 뽐냈다. 심지어 친구에게 선한 영향력까지~!
남자아이들은 모든 것을 겨룬다. 힘, 달리기, 줄넘기, 밥 빨리 먹기, 도서관에 숨기, 숨은 그림 찾기, 그림 그리기, 술래잡기 이도 저도 다 시시해지면 더 많이 아는 무엇으로 넘어간다. 공룡이름 대기, 배스킨라빈스 메뉴 이름 대기, 인기 게임 캐릭터 이름과 점수 내는 비법 등. 녀석들의 동물적 서열정리는 모든 방면에서 장르불문으로 벌어진다.
신기한 것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서로 무언가를 겨루는 중에 뽐내기도 하고 샘내기도 하며 배우고 자란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집중력은 정말 짧다. 뭔가를 즐기는가 싶다가도 바닷속 눈치 빠른 멸치 떼가 무리 지어 헤엄치다 금세 흩어지듯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선생님이랍시고 구구단을 외워보라는 둥, 독서를 가르쳐 주겠다는 둥 어설프게 끼어들어 뭔가 가르칠 꼼수 따위를 부렸다간 금세 들통나서 멸치 떼 흩어지듯 도망가 버리기 일쑤다. 녀석들의 펄떡이는 에너지는 어떤 정형화된 틀에도 가둬둘 수 없는 특별한 것이기에 도서관은 그저 수시로 산수교실도 되었다가 토론/논술교실도 되었다가 미술교실도 되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다 고즈넉한 순간이 찾아오면 각자의 취향을 찾아 흩어져 관심사대로 빠져들도록 약간의 도움을 주면 된다. 어른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시간이라는 장애물로 재단하지만 않으면 녀석들은 언제나 만능변신로봇이 된다.
시끄러운 녀석들 옆에서 나는 진지하게 교통정리를 해 준다.
"어떻게 하는 건데~?"
"어디서 배웠어~?"
"한 번만 설명해 주면 안 돼~?"
"와 정말 궁금하다~!"
"비법이 뭐야?"
"그건 민찬이가 잘하는데! 민찬아 친구한데 이것좀 가르쳐 줄래?"
"샘은 아직 못 읽었는데... 그럼 먼저 읽고 꼭 좀 알려줘~"
지가 잘나서 지 혼자 힘으로 잘 큰 줄로 알고 스스로를 사랑해 버리게끔 무심히 긍정의 씨앗만 주워다 주머니에 슬쩍 넣어주는 교통정리. 아이들에게 어른은 딱 그 정도만 해 줄 수 있다. 그 정도면 아이들은 알아서 잘 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