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아버지는 잦은 야근에,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공장에서 근무하셨다. 당시엔 다들 그렇게 일하곤 했다지만 여하튼 노동강도가 엄청난 직장이었다. 어린 동생과 나는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었다. 아버지가 보고픈 마음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퇴근하는 아버지의 잠바 주머니에 들어있는 빵 때문이었다. 야근하는 노동자들에게 간식으로 제공되었던 봉지빵을 아버지는 드시지 않고 늘 집으로 가져오셨다.
아버지의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먼저 집어넣었는데 빵이 왼쪽 주머니에 있었다면 그날 빵은 동생이 반을 갈라서 더 큰 쪽을 가져갔다. 덕분에 퇴근하신 아버지는 매일 현관 앞에서 동생과 나의 실랑이를 바라보며 껄껄 웃곤 하셨다.
"으이구... 늦게까지 일하면 배고픈데 그냥 드시지 왜 매일 이걸 가지고 와요~? 애들 양치도 다 시켰구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흘겨보셨지만 아버지는 그저 웃으셨다. 가끔 빵이 없는 날에는 어머니 몰래 우리들을 데리고 집 앞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주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절대 사주지 않는 빵빠레 같은 비싼 아이스크림을 말이다. 퇴근해 오시는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에게 매일 밤 슈퍼영웅이셨다.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교직원의 제일 이른 급식 시간은 11시 20분. 다양한 메뉴가 식판에 차례대로 담긴다. 김치, 양배추, 군만두, 오리훈제고기, 시래깃국... 마지막으로 오늘의 후식은 파우치에 담긴 오렌지 주스 하나. 학교 급식에서 후식은 다양하게 나오는데 과일 말고도, 요구르트, 마카롱, 쿠키 등 우리 둘째 아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간식이 많다. 나는 오늘의 주스를 조용히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작은 파우치에 담겨있는 오렌지주스는 오후 내내 컴퓨터 모니터 옆에 머물다 나와 함께 퇴근해 저녁 내내 식탁 한쪽에 얌전히 놓였다. 가족 중 가장 늦게 귀가하는 둘째 아들은 오늘밤 무심히 놓여있는 주스를 보고 씩 웃을 것이다. 아마 한입에 꿀꺽 마시겠지. 나는 오후 내내, 저녁 내내 오렌지 주스를 힐끗거리며 그렇게 씩 웃을 아들을 상상했다. 별것도 아닌 그 손바닥만 한 오렌지 주스는 온종일 사랑하는 아들의 미소를 담고 내 피로를 씻어주었다.
식탁에서 임자를 기다리고 있는 오렌지주스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빵을 떠올려 본다. 아버지는 야근 내내 배 고프지 않으셨을까? 부모가 되어보니 조금 알 것도 같다. 빵이 주는 배부름 보다 어린 자식들이 들려주는 웃음소리에 더 배부르셨을 아버지의 마음을. 그 마음을 그때도 알았다면 동생과 빵을 두고 좀 덜 다투었을 텐데. 그 작은 봉지 속에 든 빵을 한 번만 다시 먹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자꾸만 작아지는 아버지의 어깨에서 그 옛날의 슈퍼영웅을 떠올려본다.
아버지. 늦기전에 이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저에게 슈퍼히어로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