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정신 차리고 보면 업무지옥
사서가 되고 제일 처음 예정되어 있던 1차 도서 구입비는 잡지 정기구독에 약 180만 원, 단행본에 약 600만 원이었다. 한 번에 600만 원어치의 책을 사야 하다니! 혹시나 이 큰돈을 허투루 쓰게 될까 봐 나는 꼬박 두 달 동안 노심초사 눈에 불을 켜고 곳간에 쌀가마니 쟁이듯 목록을 차곡차곡 채웠다. 지금은 시나브로 예산이 늘어서 한 학기에만 천만 원이 넘는 도서구입비와 마주하고 있지만 당시엔 600만 원도 간이 떨릴 정도로 엄청나게 큰 예산이었다. 나는 교육청에서 발행하는 교과연계도서와 신간 추천도서 목록을 참고하고, 인근 공공도서관의 추천도서 목록, 책씨앗이나 어린이도서연구회 등 공신력 있는 사이트의 신간목록 등을 다운로드하여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았다.
그중 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은 빼고, 유사한 책이 많으면 그것도 빼고, 학년별로 혹시 저학년 도서에 치중되어 있지는 않은지도 살핀다. 출판일이 너무 오래되었거나 학습만화 등 내용이 별로일 것 같은 책도 걸러낸다. 철학, 예술, 종교분야 책은 늘 부족하다. 혹시 초등 수준에 맞는 철학, 종교, 예술분야의 책이 있는지 한번 더 둘러보고, 문학이나 그림책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덜어낸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시리즈물의 후속작이나 인기 작가의 신간도 빼먹어선 안된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관련 도서를 넣어줘야 한다. 당시에는 아이들 사이에 야구가 인기였다. 그래서 야구 관련 도서를 많이 샀다. 최근에는 종이 접기가 유행이라 종이접기 책을 여러 권 샀다. 지난 학기에 학년 프로젝트의 주제나 특색수업과 관련해서 부족한 책이 있었다면 꼭 보충해야 한다. 첫 해에는 국어사전이 달랑 세 권이어서 힘들었고, 다음 해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 수업에 관련된 도서가 다양하지 못했다. 작년에는 식물도감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이런 부분을 꼼꼼히 메모해 두었다가 수서에 반영해야 내년도 수업 지원에 차질이 없다. 학생이나 교직원, 학부모를 대상으로 접수받은 희망도서목록도 빠짐없이 넣어야 섭섭지 않다. 신간 못지않게 베스트셀러 역시 중요하다. 이래 저래 채워 넣다 보면 목록 안에서 중복되는 책이 있을 수도 있으니 잘 살펴보고 걸러야 한다. 여기까지 다 해냈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가격 정보가 모두 확실한지 한 권 한 권 한번 더 확인한다. 이 모든 일을 다른 도서관 업무를 하는 중간중간에 짬짬이 해내야 한다. 가끔 스트레스로 지름신이 강림할 때 모니터 앞에 앉아 수서를 하면 업무 효율이 높아지는 건 꿀팁.
이렇게 수서를 마쳤다고 곧장 책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교내 홈페이지에 일주일간 구매예정 목록을 게시해서 학부모나 교직원에게 이의제기 기회를 제공하고,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품의(실제 주문을 위한 서류 작업)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눈으로만 매만지던 단행본들이 지난한 시간을 거쳐 드.디.어. 실물로 도서관에 처음 입성하던 날 오후의 설렘을 나는 여태껏 잊을 수가 없다. 모니터 화면에 사진과 숫자로만 존재하던 책들이 눈앞에 실제로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니 레시피로 구경만 하던 요리를 드디어 혀끝으로 맛보는 듯한 기쁨이 일렁였다.
이 책들은 도서관에 드디어 존재하지만 아직 대출이 되는 것은 아니다. 등록번호 바코드와 청구기호 라벨을 부착하고 도서관 도장을 찍은 뒤 전산등록을 마치면 비로소 대출가능 상태가 된다. 이렇게 고비고비 넘어 도서관에 진열된 책들은 한 권 한 권이 다 내 새끼처럼 예쁘고 귀하다. 신간이 준비되면 나는 학교 전체에 신간도서들의 위용을 뽐내는 사진과 함께 기쁜 소식을 쪽지로 알린다. 대출은 늘 공정하게 선착순이다. 누군가가 '이 책 엄청 읽고 싶었던 책이에요' 라며 새 책을 데리고 나가는 순간엔 신기하게 업무의 고단함이 싹 가신다.
이용자에게 필요한 책, 이용자가 원하는 책을 손에 쥐여주는 것은 정말 보람 있는 일이다. 실은 이 설렘에 살짝 중독되어서 매월 희망도서를 구매해서 제공하다가 업무지옥에 시달렸던 해가 있었다. 반대로 자주 사는 게 산만하고 힘들어 몰아서 사다 보니 한 번에 천만 원이 넘는 목록을 준비하느라 혼쭐이 났던 해도 있었다. 자주 사면 자주 사는 대로 정신없어 힘들고, 가끔 사면 엄청난 금액에 또 힘들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해도 피로감은 피해 갈 방법이 없는 업무라는 게 명확한데, 그래도 새 책 냄새를 맡으면 피로가 풀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설레는 건 아무래도 직업병이 깊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 새 학기 도서구입비가 또 늘었던데 이번엔 겨울방학 때부터 미리미리 준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