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초보 사서의 최강 무기는 독서모임
41살이라는 이라는 늦은 나이에 꿈에 그리던 사서가 되었지만 풀어야 할 숙제가 정말 많았다. 학교라는 교육 기관의 특별한 조직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혼 전에 근무했던 사기업의 경험 따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렵기만 했다.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DLS는 낯설었고, 에듀파인 품의도 생소했다. 쉬는 시간 종이 치면 복도 끝에서부터 아이들이 우다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마다 긴장이 되어서 가슴이 할딱할딱 뛰었다. 무엇보다 초보 사서를 힘들게 했던 것은 '사서는 전문가이니 다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불쑥불쑥 날아오는 이용자들의 질문이었다.
'3-1반 교실은 어디예요?'
'여름 방학은 언제 해요?'
'이번주 2학년들 무슨 행사한대요?'
이런 학교 관련 질문은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얼추 대답할 수 있었다.
'학습만화는 왜 없어요?'
'이건 왜 비치도서예요?'
'영어 원서는 총 몇 권이에요?'
이런 도서관 운영에 관련된 질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문제는 책에 관련된 질문이다.
'독서를 싫어하는 6학년에게 추천할 만한 책 있나요?'
'한글 익히는데 도움 될만한 책 좀 골라 주세요'
'요즘 머리가 너무 복잡한데 좀 가볍게 읽을만한 재미있는 책 있을까요?'
이 많은 책을 정성스레 고르고 골라서 구매하고, 정갈히 매만져 정리하느라 진땀 빼며 보낸 시간이 얼만데! 정작 나는 그 책들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그 많은 책을 다 읽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그중 단 몇 권도 제대로 읽어 볼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기도 전에 몰려드는 학생들을 응대하느라 수서, 대출, 프로그램 기획, 장서관리, 운영계획, 공모사업진행, 청소 등등 이 모든 일들을 숨 가쁘게 쳐내느라 근무시간에 독서라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욕심껏 퇴근 가방에 넣어온 책들은 온종일 나를 기다려온 가사와 육아에 밀려 출근 가방에 그대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휴일에는 소파에 뻗어서 '미스터 선샤인'을 감상하며 지친 육신을 달래느라 책 읽을 틈이 없었다. 책을 읽어야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는 책 표지만 매만지는 반쪽짜리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명색이 사서인데 독서가 너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도 왕년에 독서 꽤나 했었다고 당당히 자부하는 1인이건만 실망스럽게도 사서가 된 후로 받아 든 독서 성적표는 너무 초라했다. 그때 학생 독서 동아리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기 초에 어설픈 모양새로 독서도 잘 되지 않던 아이들이 2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독서모임의 찐 팬이 되어 끈끈하게 독서경험을 공유하며 발전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아! 어른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래서 2021년 1월. 나는 부끄럽지만 그해 첫 번째 목표를 '독서'로 잡았다. 독서 습관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기에 고민 끝에 두 개의 독서모임에 나를 꽁꽁 묶었다. 하나는 그림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책강정'이라는 일반인 대상 지역 모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서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든 '심야비행'이라는 독서연구 모임이다. 사실 심야비행은 내가 만든 모임이다. 분명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서 선생님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역 사서 커뮤니티에 함께 책을 읽고 도서관 운영에 도움 되는 정보를 교류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더니 감사하게도 5명의 사서선생님들이 손을 잡아 주셨다. 코로나가 심할 땐 온라인으로, 코로나가 잠잠할 땐 오프라인으로 모였다. 나는 분명히 책 읽을 시간이 없었는데... 두 개의 독서모임을 시작하니 청소기는 못 돌려도 책은 읽어졌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못 봐도 책은 읽게 되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독서모임에 어찌 참여할까, 경험도 없는데 독서모임을 어찌 끌어나갈까 했던 기우는 다 쓸데없는 것이었다. 마음만 모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되었다!
그렇게 나의 독서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독서모임에서의 시간이 즐겁고 보람된 만큼 생활 속에서 독서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책을 읽고 여러 사람과 감상을 나누는 경험은 나의 시야를 넓혀 주었고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들었고 사서로서의 자신감은 덤으로 따라왔다. 같은 주제를 놓고 사색의 시간을 나눈 사람들과는 필연적으로 정말 깜짝 놀랄 정도의 끈끈한 신뢰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니 함께 하는 독서는 혼자 하는 독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림책강정에서 읽었던 좋은 그림책들을 모아 그림책전시회를 열었다. 어른들도 흔히 그림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문화가 확산되었으면 하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담은 작은 실천이었다.
심야비행에서 함께 읽은 책과 함께 나눈 도서 정보들은 모두 기록되고 있으며 도서관 운영에 큰 자산이 되어가고 있다. 다른 사서들에게도 이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경남 사서연수에서 심야비행의 경험을 공유했다. 혼자 읽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사실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독서모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읽고 대화하면서 내면의 깨달음이 쌓이다 보니 아는 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소명이 생겨났고, 기록하고 싶은 욕망이 차올랐다.
그림책강정과 심야비행의 12월 마지막 모임에서 나는 와인잔을 채우며 구성원들과 함께 한해를 갈무리했다.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며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책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는 갈증이 시간을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었고 마른논에 흘러드는 물줄기 마냥 해갈되는 즐거움에 독서라는 습관이 시나브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인지, 그전에 가졌었던 다른 어떤 송년회에서도 이렇게 진심 어린 감동과 감사가 넘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깨닫고 알아챈 것을 삶에 녹여내며 실천하는 독서의 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독서모임이 분명하다.
해가 바뀌는 이때에 새삼 한해를 되돌아보니 치열하게 점찍으며 보냈던 일상이 굵직한 선이 되어 내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나침반이 되어준 독서모임에 올해도 소중한 점을 하나씩 찍어 갈 것이다. 더불어 더 많은 그림책강정과 심야비행이 생겨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