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광고전화는 잘 받지 않거니와, 사전차단 되어서 연결되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02로 시작하는 이 낯선 번호는 사전차단되지도 않고, 광고라는 꼬리표도 없이 내 소중한 점심시간을 3분 남겨둔 시점에 문득 걸려왔다.
조심스레 목소리에 경계태세를 얹어 전화를 받았다. 서울말을 쓰는 상대편은 더욱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전화 건 목적을 조곤조곤 전했다. 얼마 전 sns에서 본 그린피스 광고에 동의 서명을 한 사람이 맞냐고 묻는다. 그렇다. 기업들에게 플라스틱 생산 중단을 요구하는 국제플라스틱협약 체결(75% 생산 감축안) 지지 안에 서명을 했었다. 환경보호를 위해 앞장서서 실질적 행동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내 시간을 1분 정도 투자해서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고맙다고 생각했다. 환경보호를 해야 한다고 입으로만 말하는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의미한 행동에 보탬될 기회를 주는 것이니 고마웠다.
수화기 너머 서울말씨의 청년은 다가오는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5차 국제 플라스틱 협약 마지막 협상 회의(INC5)에서 강력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이 성사되도록 힘을 싣는데 필요한 자금을 그린피스에서 모금 중이라고 했다. 후원금은 300원도 되고 만원도 되고 그 이상도 가능하다고 한다. 설명을 이어갈수록 발신인의 목소리는 조심스럼에서 공손함으로 그리고 머뭇거림으로 변해가며 작아졌다. 수많은 거절을 경험한 사람의 목소리. 다음 거절을 대비해야 하는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전화를 걸기 위한 목소리로.
경계심 가득 담아 '여보세요'를 시작했던 나는 덩달아 부끄러워졌다. 이 청년이 자신의 소신과 신념에 따라, 수많은 거절과 외면을 무릅쓰고, 몇 번째인지, 며칠째인지 모를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고작 동의서에 서명 한 번 하며 우쭐했던 나는 어른이 맞는가?
물론 그린피스라는 환경운동 단체가 정말 일을 똑바로 하고 있는지, 내 후원금이 진짜 플라스틱 생산 중단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마중물로 잘 쓰일지 나는 소상히 알 수 없다. 단체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나 기업의 간섭을 피해 일반인들의 순수 후원금만으로 운영된다는 철학을 믿어볼 뿐이다. 역대급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여적지 환경이 정말 문제라고 툴툴거리기만 했던 나는 부끄러움을 면피하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월 만 원짜리 후원계좌를 등록하겠다고.
300원도 가능하다던 작은 목소리의 청년은 만원이라는 내 말에 반색하며 '정말'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고맙다고 했다. 그 와중에 나 역시 사는 형편이 녹록지 않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만원이라는 숫자와 겨우 타협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청년이여, 그대는 지구에 빚진 어른들에게 좀 더 당당하고 씩씩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광고전화를 걸어 주어서 감사했음을 꼭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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