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모두 자기만의 독서 시간표가 있다.

ㅣ 책을 골고루 안 읽어서 걱정이예요

by 느닷

도서관에 학급방문을 오면 아이들은 적어도 한 권은 무조건 골라서 손에 쥐어야 한다. 5학년 7반의 지윤이는 1학기 첫 학급방문 때부터 그림책만 어쩔 수 없이 대충 골라갔다. 더 긴 글을 못 읽는 것인지, 독서를 싫어하는 것인지 한눈에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나는 일단 무조건 개취존중. 그래서 재미있는 그림책이나 새로 들어온 그림책을 권해줬다. 가끔 키득키득 거리며 같이 읽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학기 내내 그림책을 권했더니 2학기 어느 날 문득 그림책 말고 다른 책을 권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서샘 재미있는 소설책 한 권 골라주세요. 선생님은 진짜 재미있는 책만 권해주시니까 믿고 읽어 볼래요"

나는 지윤이에게 차율이 작가의 '묘지공주'를 권해주었다. 지윤이는 다음날 눈을 반짝거리며 다 읽은 책을 반납했다.

"선생님 진짜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책 또 있어요?"

지윤이는 그 뒤로 차율이 작가의 인어소녀, 괴담특공대, 미지의 파랑을 차례대로 섭렵하고는 창비청소년 문학으로 건너가 800번대 서가에 푹 파묻혀서 겨울방학을 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계명작과 과학전집 등 각종 시리즈를 엄청나게 많이 읽은 친구였다. 하지만 집에서 강제로 읽은 어려운 책들에 질려서 독서를 거부했었던 것이다.




3학년 태훈이는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는 매일 '윔피키드'시리즈를 빌려갔다. 보고 보고 또 보고 외울 법도 한데 그래도 재미있는지 교실로 가는 복도에서 걸으며 읽다가 나에게 몇 번이나 타박을 들었다.

비슷한 수준의 다른 재미있는 책을 몇 번 권해봐도 몇 달 동안 눈하나 꿈쩍하지 않던 태훈이가 어느 날 자기 손으로 '의외로 친해지고 싶은 곤충도감'을 골라왔다. 태훈이는 그 뒤로 곤충 관련 책만 읽었다. 나는 개취존중 차원에서 태훈이를 위해 곤충도감을 세권이나 더 샀다. 4학년이 된 태훈이는 여전히 돋보기안경 너머로 책을 읽으며 복도를 걷다가 나에게 들켜 잔소리를 듣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장르를 불문 다독왕이다. 신간 중에 어떤 책이 재미있는지 없는지,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을지 없을지는 태훈이 한테 물어보면 다 알 수 있다.


2학년 해선이는 두꺼운 책이나 영어 원서를 척척 읽는 잘난 친구 옆에서 자신은 어려운 책은 읽을 줄 모른다며 기가 푹 죽어 있었다. 그림책조차 펼쳐보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해선이와 친구들에게 짬짬이 재미난 그림책을 읽어주고는 1학년 동생들에게 이런 재미있는 책을 소개해 주거나 찾아주는 임무를 주었다. 해선이는 그림책 작가 김영진의 팬이 되었고, 한 학기 만에 그림책 서가 속 인기도서 위치를 꿰뚫고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렇게 3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줄글 책으로 넘어갔다.


1학년 아이들에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한두 명 빼고는 모두 다 손을 번쩍 든다. 그런데 4학년만 되어도 그 수가 반도 안된다. 그리고 6학년 교실에서는 이런 질문 자체가 비웃음거리 수준으로 전락한다. 왜 그럴까? 독서가 좋다고 그렇게 손을 번쩍번쩍 들며 자신이 얼마나 재미있는 책을 많이 아는지 자랑하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내가 오랜 기간 고민하고 있는 미스터리이다.


책과 도서관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학생의 경우는 환경적인 부분에서 고민이 필요할 것이고, 일단 도서관에 드나들며 뭐라도 한 권 손에 쥐고 가는 아이들은 나는 독서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약간의 협조가 필요할 뿐. 다만 독서를 학습만화로 시작했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현재 만화책만 읽는 학생의 경우는 내 경험상 독서를 아예 하지 않고 있는 학생의 경우보다 변화가 어렵고 발전이 더디거나 때론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만의 독서 시간표가 있다. 그림책을 읽을 때, 곤충책을 읽을 때, 역사책을 읽을 때, 드디어 두꺼워도 더 긴 이야기를 읽고 싶을 때... 이 시간은 어른의 기준으로 봤을 때 너무 더뎌서 답답할 수도 있고 아주 짧아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장속도와 취향에 따라 변화의 양상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가 자기만의 시간표 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어른들은 대체로 이 시간표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탈이다. 심지어 표준 독서 시간표를 아이에게 강요한다. 이제 4학년이니까 동생처럼 그림책 가져오면 안 된다고 줄글책만 대출하라는 규칙을 정하는 선생님. 방학숙제로 오래된 교과연계 도서만 빼곡히 적어주는 선생님. 어른책은 빌리면 안된다고 함부로 한계를 그어버리는 선생님. 아이가 공룡책만 읽는데 어떻게 하면 그 책을 그만 읽게 할 수 있을지 내게 상담하는 어머니, 중학교 가기 전에 미리 역사와 고전은 떼고 가야 하는데 절대 안 읽으려 한다며 한탄하시는 어머니들에게 못했던 말을 이곳에 적어본다.


'제발 우리 아이들의 호기심과 안목을 좀 믿어 주세요~ 엽기떡볶이 사달라고 했는데 생선구이 정식을 들이밀면 맛있겠어요? 메뉴선택은 본인이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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