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 키건
제목이 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일까? 무엇이 사소한 것인가? 클레이 키건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 되짚어 읽으며 이렇게 질문하게 될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삶이 되고, 우리가 되고, 사회가 된다. 반면에 그 속에 사소한 어떤 균열도 누적되며 일상을 바꾸고, 우리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 핸드백에 쏙 들어갈만한 114페이지짜리 작은 책에 담긴 저자의 메시지는 간단명료하다.
내 일상을 위해 이웃의 파멸을 못 본 체 할 것인가? 당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서 당당히 거울 앞에 설 수 있는가?
필사 _ 펄롱의 용기에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는 명장면~!
p.80
곧 첫 번째 미사 종이 울릴 터였다. 펄롱은 새로 생긴 기묘한 힘에 용기를 얻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기는 남자고, 여기는 여자들밖에 없으니까.
... 중략...
펄롱은 수녀원장이 자기가 그냥 가길 바란다는 걸 알았지만, 걸음을 멈추고 여자아이 옆에 섰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필사 _ (스포 있습니다~!) 고난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주인공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마지막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살면서 이런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나볼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p.119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 중략...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실제로 1996년에 문을 닫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허구의 주인공 펄롱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당시 정부지원을 받은 비슷한 18개 시설에서 최소 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투엄 보호소에서 1925년~1961년 사이에 사망한 아기가 796명이라고 공개되었다. 대부분의 기록이 파기되었기 때문에 이 시설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감금, 강제 노역을 당했는지 정확한 수치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러한 시설들이 긴 세월 멀쩡히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사회공동체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작가가 꼬집는 부분은 이 지점이다. 어째서 펄롱 같은 사람이 없었을까? 어째서 우리는 펄롱같이 행동하지 못하는가? 내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사소한 것들 중 어느 것 하나에도 흠을 내고 싶지 않은 내면의 이기심이 작품 곳곳에 아궁이 먼지처럼 묻어있다.
그렇다면 펄롱은 어떻게 지역사회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수녀원의 뜻을 거스르고, 그 속에 핍박당하고 있던 아이를 당당히 데려 나올 수 있었을까? 미혼모였던 어머니를 가족처럼 거둬주고, 어린 시절 미혼모의 아들인 자신을 아들처럼 가르쳐준 미시즈 윌슨의 친절한 기억 때문에? 친부가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고 뒤에서 군불 같은 사랑으로 지지해 주었던 네드 때문에? 위선을 차마 지나칠 수 없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펄롱은 지역사회에서 소통하고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아내와 대화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수레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한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매진하고 있는 일, 내가 지키고 있는 가정. 이것이 삶이 내게 지워준 의미가 맞을까?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는가? 이러한 문답 속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내면의 열망이 그를 거리로 이끈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음을 선택했을 때 견뎌야 할 후회와 부끄러움을 경멸할 수 있는 내적 근육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하지 않으려던, 심지어 주변에서 강경하게 말리는 '옳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우리는 다시 질문해 봐야 한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가? 내 삶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옮긴이의 글 중 발췌글
이 소설에 나오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같은 이름과 명분의 여러 시설 가운데 하나다.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 성매매 여성, 혼외 임신을 한 여성, 고아, 학대 피해자, 정신이상자, 성적으로 방종하다고 평판이 있는 여성, 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까지 마구잡이로 이곳에 수용했고 교회의 묵인하에 착취했다.
동네 사람들은 세탁소의 실체에 대해 짐작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높은 담 안에서 저질러지는 학대에서 눈을 돌린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빌 펄롱의 내면에도 차마 하지 못한 사소한 일들, 쉽사리 입 밖에 내지 못한 모호한 말들이 꽉 차서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지경이다. 수녀원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너무 크고, 그 안의 어떤 존재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가 너무 작은 존재라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펄롱에게 뒤에서 작고 소박한 사랑밖에 줄 수 없었던 네드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것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 홍한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