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현행범을 검거했다.

by 느닷

모든 숨은 그림 찾기, 퀴즈, 종이접기 책에 '오리거나 낙서 금지, 눈으로만 봐주세요'라고 써 붙였어야 했는데 깜빡했다. 백번 양보해서 이용자 교육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권당 35,000원짜리 대형 숨은 그림 찾기 책 3권에 난무하는 동그라미가 너무 빼곡하게 대범한 꼴을 하고 있었다. 범인은 아마 철부지 1학년이나 2학년쯤이겠지? 범인의 몽타주를 상상하며 후회와 자책을 곱씹었다. 한 시간 동안 독한 아세톤 냄새를 들이켜며 코팅된 페이지를 박박 닦았다.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뒤.


"음음음~~~ 여기 꼭 우리 아지트 같다~"

흥얼흥얼 콧노래와 함께 5학년 남학생들이 하나 둘 도서관으로 모여들었다. 사서의 시선이 닿지 않는 도서관 제일 구석방에 가방을 던져놓고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녀석들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렇지. 심신 안정과 안녕을 위한 선생님과의 거리 두기는 모든 학생의 본능이기에 암묵적 거리를 지켜주는 매너는 필수. 하지만 요즘 부쩍 자주 드나드는 녀석들을 호시탐탐 눈여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거리를 조금 좁혀볼 요량으로 취향에 맞는 책이나 좀 권해볼까 싶어 슬쩍 다가갔다.


"야... 이 숨은 그림 찾기 책 너무 어려운 거 아니냐~? 어! 여기 하나 찾았다!"

"나도!"

헉. 덩치 큰 5학년 남학생 6명이 손에 네임펜을 하나씩 꼭 쥐고 방을 가득 채운채 엎드려 있었다. 얼마나 신났는지 구부린 무릎 끝에 발을 대롱대롱 좌우로 흔들어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범행현장을 이렇게 빨리 목격하게 될 줄이야. 현장검거를 실시했다. 나는 호흡을 진정시키고 녀석들을 불렀다. 모두 하던걸 멈추고 일어서라고 명령했다. 대형 숨은 그림 찾기 책에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친목을 도모하던 녀석들이 펜을 꼭 쥔 채로 엎드려 나를 올려다본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은 언짢은 눈빛 12쌍이 나를 향했다.


"얘들아. 이 책은 누구 거지?"

학교 꺼요, 우리 거요, 도서관 꺼요. 자기들도 그 정도는 다 안다는 듯 대답이 당당하다.


"이 책은 누가 보는 걸까?"

친구들이요, 우리들이 다 같이 보는 거요... 엉거주춤 일어서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럼 여기 정답을 이렇게 표시해 두면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하지~?"

아.... 이제야 사태파악이 된 학생들이 두 손을 공손히 모은채 주섬주섬 변명을 시작한다.

"저는 오늘 처음 와서 몰랐어요!"

"오~, 선생님도 이 가방 누구 건지 모르니까 가져가도 돼?"

"얘들이 하길래 그냥 따라 한 거예요."

"아~, 친구가 여기서 똥 누면 너도 따라 바지 내릴래?"

"다들 이렇게 하고 있길래 그냥 따라 했어요."

"와~ 우리가 다 같이 그냥 너 때리면, 너 그냥 맞고 있을 거야?"

"아니 이 친구가 하자고 하길래 허락받은 줄 알았어요."

"음~, 친구가 이거 훔치라고 하면 그것도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얘들이 먼저 했어요. 다들 이렇게 하고 있어서 당연히 동그라미 쳐도 되는 줄 알았어요."

"남들이 다들 도둑질하면 도둑질이 당연한 일이 되는 거야?"


도통 도서관에 오지 않던 학생들이니 몰랐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처음은 있다. 모를 수 있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데 이 아이들이 그걸 못한 것이다. 잠시만 멈춰 서서 생각해 보면 되는데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아무 생각 없이 당장의 기쁨만 쫓아 남들을 따라 할 때 생긴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처음 만나는 상황, 애매한 무엇 앞에서는 꼭 알아보고 물어보고 생각해 보자 했다. 여기는 특히 알아보고 찾아보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데 특화된 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모두 5학년 남학생들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도서관에 발길 하지 않는 정말 정말 귀한 손님들이 요새 어쩐 일로 우르르르 몰려오나 신기하고 반갑던 참이었다. 내가 미리 세심히 살피지 않은 탓에 이리 찬물이 끼얹혔다. 어째야 하나... 일단 이름을 물었다.

'왜요...? 담임선생님에게 이르려고요?"

어른이 다가와 말을 거는 순간부터 어깨를 움츠린 채 삐딱한 고개로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혼나는데 익숙한 몸짓이다.

"도서관에 놀러 오는 5학년 남학생이 드문데 이렇게 다 같이 자주 오니까, 기억해 뒀다가 도서부 모집할 때 스카우트할까 싶어서 물어봤어." 하나 둘 경계의 눈빛이 풀어진다.


문제는 언제나 생길 수 있다. 문제가 진짜 '문제'가 되는 건 '문제'앞에서 도망갈 때 생기는 법. 너희가 문제를 해결한다면 문제는 언제나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된다. 그러니 지금부터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 보자고 제안했다. 아세톤과 물티슈를 받아 든 녀석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쉽게 해결하면 쉽게 잊힐 테니 미션의 난이도를 살짝 높여 주었다.

"이것도 도서관 물건이니까 아껴 써야 해. 물티슈도 1인당 딱 1장씩만 쓰고, 아세톤도 요만큼만 쓰고 남겨서 돌려주세요."

숨은 그림을 찾으며 낄낄거리던 녀석들은 무릎을 꿇고 않아 한 방울의 아세톤으로 최대한 많은 동그라미를 지우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 방울 쓴 녀석에게는 호들갑스러운 질타가 쏱아졌다. 이렇게까지 진지할 일인가 싶어 뒤늦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들썩이는 내 입꼬리를 봤는지 어쨌는지 아이들은 방금 내가 했던 말투를 따라 하며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너네는 뭐가 없다~?"

옆에 있던 녀석이 근엄하게 대답한다.

"생각이 없다~!"

"함부로 따라 하지 말고! 앞으로는 뭐가 필요하다?"

"내 생각이 있어야 한다~!"

아니 내가 꼭 그런 투로 말한 건 아닌데... 조금 억울했지만 반성하며 낙서를 지우고 있으니 꾹 참았다.

"우리가 한 짓을 해결했어! 사서쌤에게 성과를 보여주자!"

아이들은 깨끗해졌지만 군데군데 희미하게 탈색된 대형 숨은 그림 찾기 책을 들고 와 내게 페이지별로 보여주며 뽐낸다. 그리고 바닥에 깔릴 만큼 조금 남은 아세톤 병을 의기양양하게 흔들었다.

"오~ 좋아! 문제를 잘 해결했네! 다음부터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애매한 건 선생님과 꼭 이야기 나누자! 그리고 모르는 게 싹 없어질 때까지 도서관에 자주자주 놀러 오기~!"

"네~,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생각을 하겠습니다!"

대출/반납 데스크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6명의 남학생들이 모여 서서 이구동성으로 다짐했다. 시커먼 파카까지 걸쳐 입어서 그런지 도서관 출입구가 좁게 느껴졌다. 내일 또 놀러 오면 고사성어 O, X 퀴즈 책을 줘 봐야겠다. 다음 봄에는 저 녀석들 덕에 북적거릴 도서관을 상상하며 홀로 웃었다. 오늘 35,000원짜리 숨은 그림 찾기 책이 제 값을 톡톡히 했다.

사실 어른도 다르지 않다. 그냥 남들이 그렇게하니까, 대부분 그렇다 하니까, 모르니까 대충,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것 같아서, 남들 따라 그냥.

아이들의 변명이 어른 들의 세상과 꼭 닮은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며 큰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진짜 어른들이 보여주고싶어하는 세상이 담겨있다. 아이들이 나이만 많은 어른 말고 진짜 어른들의 글 속에서 생각근육을 키우며 자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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