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때 달라요
도서관 왕래가 드문 3학년 젊은 담임 선생님이 어색한 두 손을 비비며 나를 찾아왔다.
“저희 반 학생 한 명이 골반뼈 골절로 입원을 했는데요... 죄송하지만... 어떤 책을 좀 가져다주면 좋을지 추천 부탁드려요”
마지못해 머뭇거리며 하는 부탁의 말속에 눈치와 의심이 묻어있었다. 사정인 즉슨 3학년 여학생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가 크게 다쳐서 병원에 한 달 이상 꼼짝없이 입원하게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을 불러다가 병문안을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시며 빈손으로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한 달간 읽을 재미있는 책을 선물로 챙겨가라고 덧붙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책을 얼마나 들고 갈지는 사서선생님이 알아서 다 챙겨줄 테니 걱정 말라며 도서관으로 담임선생님의 등을 떠민 것이다.
도서관 규정상 학생은 최대 3권을 일주일간 대출할 수 있다. 교사는 5권을 2주간 빌릴 수 있다. 입원한 학생이 한 달간 (정말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10권으로도 부족할 테고, 한 달 안에 반납되지 않을 확률도 높다. 사실 이렇게 예외적인 운영을 요구하는 상황은 익숙하다. 나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담임선생님을 안심시켰다.
“선생님 학급으로 최대 30권을 한 달간 빌려드릴 수 있어요. 3학년 여학생이 좋아할 만한 책으로 20권 정도 골라 드릴게요. 그리고 혹시 한 달 지나서 반납되더라도 괜찮으니 분실되지 않게만 챙겨봐 주세요~“
이럴 때 대출해 줄 책은 정말 신중한 엄선의 시간이 필요하다. 언제 반납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인기도서를 포함시키면 큰일이 난다. 그렇다고 지루해하고 있을 환자에게 재미없는 책을 보내서도 안된다. 그런데 그 책을 학생에게 건네줄 사람은 선생님과 보호자. 만화책 같은 흥미위주의 책만 고르면 어른들은 바로 싫은 기색을 보일 것이다.
먼저 이 여학생의 이전 대출기록을 검색해서 수준과 취향을 파악했다. 아쉽게도 도서관을 별로 이용하지 않던 학생이었으므로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전제하에, 나는 서가를 서성이며 신중하게 책을 선택했다. 친구관계, 강아지, 요리, 옛날이야기, 판타지동화, 그림책, 만화로 된 한국사, 그림 따라 그리기 등 책을 싫어하는 3학년 여학생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만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골랐다.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두께는 얇거나 100페이지 이내의 그림이 많은 책이면서, 신간이어서는 안 되고 작년쯤에 인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서가에 조용히 있는 그런 책들을 골랐다.
부디 다친 여학생의 지루한 병실 생활에 작은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도 함께 포장해서 담임선생님에게 대출을 해 주었다. 특히 부모님께서 학생에게 책을 한꺼번에 전하지 말고 반드시 하루에 딱 한권씩만 전해야는 한다는 당부의 말도 첨부했다. 원치도 않았던 20권의 도서가 침대 머리맡에서 의무감이라는 이름으로 망부석이 되버릴 가능성이 제일 높기 때문이다.
책은 무려 두 달 뒤이긴 했지만 20권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나는 한 달이나 밀린 연체를 슬쩍 풀어두었다. 그 책들이 병실에서 정말 유용했을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교장선생님, 담임선생님, 사서의 응원 정도는 학생에게 전달되었으리라 믿고싶다.
연체도서의 연체기간을 언제나 마구 풀어주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봐서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연체해방권을 남발했다가는 아무도 제때 책을 반납하지 않는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악.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무릇 초등학교 도서관은 학생들의 첫 도서관으로서 도서관 이용규칙을 똑바로 가르쳐 줘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곳 아니겠는가! 그래서 초보사서 시절에는 장기연체자를 앞에 두고 안타까운 마음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거리기도 했었다.
아직 학교생활이 미숙한 초등학생들은 책을 대출해놓고 까맣게 잊기도 하고, 분실했다가 몇 달 만에 나타난 책을 머쓱하게 들고 오기도 한다. 장기연체자가 되지 않도록 중간중간 연체사실을 통보하고 반납을 독촉하지만 끝내 장기연체자의 타이틀을 거머쥐는 아이들은 늘 존재한다. 그런데 연체가 89일, 103일 뭐 이런 정도가 되면 이 학생은 이번 학기에 더 이상 도서대출을 할 수가 없다. 특히 1, 2학년들 중에는 2달을 연체한 자신이 왜 친구들과 달리 계속 대출이 거부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으면 도서관에 발길을 끊을 것이 뻔하다. 다시 대출 반납을 연습할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냥 연체를 풀어줘 버리면 대출반납 규정이 궁색해져 버릴까 봐 염려스러웠다.
고민 끝에 장기 연체자들은 도서관에서 일정시간 봉사활동을 하면 연체를 풀어준다거나, ‘연체해방의 날’ 같은 도서관 이벤트를 열어서 공식적으로 구제를 해 주었다. 이도저도 안될 때는 사서의 권한으로 도서관 대출반납 규정에 대한 일장연설과 함께 슬쩍 연체를 풀어주기도 한다.
일부러 도서를 연체시키는 학생은 잘 없다. 그리고 모든 도서관 이용 규칙은 학생들의 도서관 이용을 돕고 독서를 독력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니 연체된 도서 때문에 미안해하고 눈치 보는 학생들이 도서관과 인연을 끊게 할 작정이 아니라면 사서는 회유의 미소를 장착하고 연체해방 필살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맞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내 경험상 장기 연체자를 대하는 사서의 품격은 질책과 비난이 아닌 위로와 공감이어야만 이용자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