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앓이 하는 이들

ㅣ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삶

by 느닷

찬물을 싫어하는 악어, 산소통을 챙기는 원숭이, 이상행동을 보이는 멸종위기 동물들이 등장하는 그림책이다. 제목 그대로 도시에 서서히 서서히 물이 차오른다. 차오르는 물이 많든 적든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차오르는 물이 내 숨을 막히게 하고 일상을 빼앗아 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물이 턱밑까지 차올라 도시가 마비되자 그제야 대중은 행동에 나선다. 특히 작고 약한 동물의 숨통이 제일 먼저 공격당하는 모습.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익숙함에 기분이 싸하다.

세월호? 전쟁? 왕따? 가정폭력? 노동문제? 환경문제?

그림책 말미에 제시된 단 하나의 해법은 '함께하는 것'이다.

도시에 물이 차올라요 / 마리아 몰리나 글 그림 / 김지은 역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출판

큰 변화 앞에는 항상 막을 수 있는 작은 신호들이 존재한다. 이것을 외면했을 때 우리는 결국 더 큰 재앙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그럼. 문제가 커지는 동안 우리가 놓치는 작은 신호는 무엇일까? 우리가 외면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고 힘을 합치면 막을 수 없는 재앙이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아는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가 많지 않다는 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 많지 않은 사람이 내 주변에는 유독 많다. 반찬통을 들고 가서 두부를 사 오는 그녀는 탄소발자국을 걱정하며 소비를 줄이고, 일회용품을 쓰는 순간들을 경계하느라 늘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바지런을 떤다. 약하고 아픈 이들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는 입고 있던 패딩도 벗어 주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이다. 사서가 없는 도서관을 순회하며 관리하는 그녀는 독서교육기회의 불평등함과 사서가 없는 도서관에서 낭비되는 예산에 마음아파 하는 프로 걱정러이다. 전담사서들의 부당한 처우에 분노하며 권리향상을 위해 앞장서서 투쟁하고 또 투쟁하는 그녀는 바빠도 아파도 늘 선두에 서 있다. 돈 못 버는 아이들에게 버스비는 너무 비싸다며 미성년자의 이동권을 위해 버스정류소마다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그녀가 내게 받아간 사회운동의 서명 종류는 과자 종합선물세트만큼 다양하다. ‘2023년 하반기 진주시 청소년 시내버스 무료화’ 계획이 뉴스에 발표되었다. 그녀가 물개박수를 쳤다. 하지만 이런 해피엔딩은 아주 드물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사느라 늘 아프다. 세상이 보내는 작은 신호들에 대답하고 부당함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하기에 그녀들은 기꺼이 끙끙 앓는다. 그녀들을 보고 있노라면 무력한 나는 혼자 흘린 과자를 주워 먹기라도 한 듯 부끄럽다. 소중한 나의 그녀들이 세상앓이를 그만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보지만 소심한 나는 늘 흘린 과자의 먼지를 몰래 털어먹는 쪽에 서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지 않다.


대학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도착한 병원 대기실에는 환자들이 가라앉은 먹구름처럼 가득했다. 다들 무표정한 얼굴에 굳게 다문 입술을 하고 있다. 좋은 일로 이곳에 오는 사람은 없기에 뭐 그 정도면 대충 생활매너는 지키고 앉아있는 셈이다. 단 한 사람. 생활매너 장착이 안된 한 중년의 남자가 언짢은 얼굴로 긴 줄 사이에 어정쩡히 서 있었다. 자기 차례가 오자 생활방수 잘 되는 폰을 삿대질 대신 흔들며 간호사에게 쏘아붙였다.


“지난번에 진료받은 기록을 달라니까 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합니까?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내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일을 이따위로 배웠어? 환자응대 하는 법 몰라요? 왜 자꾸 같은 말 하게 만드냐고! 아가씨 가정교육 그렇게 받았어? “


중년의 남성은 아침부터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분명 특별히 더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 보려 했지만 줄줄 새는 막말이 언성을 높이며 선을 넘는다. 건너편에 서있던 무표정한 내 얼굴에 까지 침이 튀는 듯했다. 쩔쩔매는 간호사들과 무표정한 환자들은 순식간에 더러운 공기를 함께 들이마셨다. 점점 갑갑하고 숨쉬기가 힘들어졌지만 마스크 위로 눈알만 굴릴 뿐 누구 하나 중년남성의 거친 언행을 제지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도!


아차! 세상앓이를 하는 나의 그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분명 눈알만 굴리고 서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배꼽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맙소사! 내가! 굳이! 우리 아들이 곁에 있었다면 분명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나서지 말라고 애원했을 게 뻔했지만 나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선생님.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여기 줄 서있는 환자들도 다 바쁘고 아프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간호사님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인데 간호사님께 인신공격 그만하시고 지금 가지고 계신 문제만 얼른 해결하시지요 “


니가 뭔데 나서냐고, 내가 언제 인신공격을 했냐고 발끈하는 중년의 남성을 나는 본격적으로 마주하고 섰다. 당신의 부당한 언행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내 마음을 발끝에 모아 우뚝 섰다. 당당히 턱을 들고 좌중을 둘러보며 눈빛으로 질문했다. 거기 눈알만 굴리고 있는 당신들의 방관은 저 중년남성의 행동에 동의함을 뜻한다는걸 알고 있냐고! 나는 달달달 떨리는 호흡을 숨기고 한껏 목소리를 가라앉혀서 다시 권했다. 인신공격 하신 거 사과하시고, 문제만 해결하고 가시라고. 그제야 노년의 신사분이 두 팔 벌려 중재에 나섰다. 기세등등하던 중년의 남성은 여전히 니가 뭔데를 반복했지만 뒤늦게 따가운 눈총들을 느끼고 자세를 낮추었다.


진료를 보고 나오는 내게 간호사들이 괜찮냐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니 더 빨리 막아섰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나는 머쓱한 대답을 흘리는 둥 하고 나왔다. 사실 당신들이 아닌 나를 위해서 한 행동이라 어설피 고백할 뻔했다. 부당함을 마주하면 누구든 외면하지 않고 함께 맞서는 행동이 상식인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내 바램 때문에 한 행동이라고 호소할 뻔했다. 아... 아무래도 세상앓이가 나에게 옮은 것 같다. 콜록...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도록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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