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올라 넘칠 때 받아 적기

ㅣ진짜 독후활동

by 느닷

누가 반납 대에 신디 더비의 그림책 ‘두 마리 당장 빠져!’를 툭 올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고개를 들어 반납의 주인공을 올려다보니 5학년 담임선생님이다. 정말 바빴지만,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야 하는 순간이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기에 감상을 공유하고 싶었다.


“선생님 이 책 어땠어요? 내용이~” 상대방이 음.... 뜸을 들이는 순간 나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랏! 신디 더비의 작품을 읽고 호들갑스레 ‘정말 좋아’를 반복하며 표지를 쓰다듬었던 내 모습만 생각나고 어떤 부분이 좋았었는지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에 읽은 그림책인데도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다행히 선생님이 지킴새 곁에서 저녁 도토리를 가져다주던 새의 신념에 대해 감상을 나눠 주셨고 듣다 보니 스멀스멀 기억이 떠올랐다. “맞아요! 리더가 지쳤을때 조차 리더를 포기하지 않고 지지할 수 있는 이 두 마리 새의 강직한 소신이 대단해 보였어요.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좀 아쉬웠어요. 선생님은 어땠어요?”


책수다를 떤 만큼 나의 퇴근 시간은 늦어져 버렸지만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나니 지난 학기에 잠시 나를 스쳐 갔던 소중한 감상을 되찾은 것 같아 뿌듯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니 책을 더 깊이있게 다시 읽은 듯했다.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스쳐 간 감동과 깨달음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해 보았다. 짬짬이 짬 내어 읽어 온 책들이 적지 않은데 너무 아까웠다. 읽고 느낄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변하고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바구니 구멍으로 모래알 빠져나가듯 다 흘려보내고 텅 빈 망각의 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도서관에는 A4용지 반을 잘라 '책똥누기'라는 제목을 붙여 비치해 두는 책상이 있다.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서 질문이나 감상 등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이를 적는 용지이다. 나에게 제출하면 칭찬의 뜻으로 비타민을 하나 받을 수 있고 다른 친구들도 감상할 수 있게 복도에 전시해주는 달콤한 거래이지만 절대 강권하지 않는다. 내 경험상 비타민은 어디까지나 책똥누기를 시작하는 동기유발의 미끼 그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간혹 자신이 발견한 책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얼마나 놀라웠는지 내게 재잘재잘 자랑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조용히 책똥누기 종이를 내민다. 지금 그 이야기를 까먹기 전에 한번 적어 보라고. 짬이 되면 적어낸 내용을 소리내 읽어주며 함께 이야기를 잠시 나눈다. 그럼 아이는 그 책을 두 배로 즐기게 된다. 그렇게 책똥누기를 시작한 아이들의 글은 대부분 시나브로 성장한다. 책 읽기의 즐거움도, 글쓰기의 즐거움도 맛본 덕분이다.


요리, 종이접기, 만들기, 퀴즈, 무슨 놀이 등등 독후활동이 주목적인 독서수업이 많다. 독후활동을 위한 책 읽기는 무늬만 독서다.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심지어 독후감을 써야 해서 강제로 들게되는 독후감용 독서는 독서계의 숙적이다. 정말 재미있는 영화는 별점으로 대변되는 관람객의 입소문으로 100만 관객을 끌어모으고, 좋은 책은 독자들의 입소문으로 인기도서가 된다. 나를 자극하는 무엇을 만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말하고 싶고 나누고 싶어진다. 감상이 차오르면 말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표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면 그게바로 진짜 독후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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