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장점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야지' 라는 생각과 타인의 단점을 보고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실은 엄청난 능력이다. 그 능력 여부에 따라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좋은 사람이 되었는가 좋지 않은 사람이 되었는가가 결정된다.
십년정도 직장생활을 했다는 것을 요즘 누구에게나 경력처럼 말하고 있는데 객관적으로 십년은 적지 않은 시간이고 그 시간동안 내가 뭔가 겪고 느꼈다면 다른 사람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라 나의 주장에 객관성을 뒷받침할 때 종종 10년을 이용한다.
내가 겪은 사회나 가정이나 어디든 나에게는 두부류의 사람이 있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원래 좋은 사람은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반면에 원래 나쁜 사람은 그냥 좋은 사람이 되려는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늘 항상 쉽기 때문에 잠시라도 방심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나쁜사람이 되는 것 같다. 이건 성악설인가. 때때로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적어도 조직생활에 있어서.
나는 마침내 좋은 사람이 되려는 선택을 했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좋은 사람이 되는 노력은 어렵지만 간단하고 애초에 좋은 사람은 아니라서 조금 머뭇거리는 순간도 있다. 심지어 좋은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나에게 늘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늘 좋은 사람만 만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노력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고 이미 좋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보통 '내가 나이가 많아서..' 라는 말을 종종 한다. 나이가 많아서 글이 안보인다. 나이가 많아서 잘 못따라 가겠다. 나이가 많아서 머리가 굳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디어가 없다. 나이가 많아서............는 언제든 꺼내쓸수있는 마법의 카드처럼 어떤 불리한 상황도 합리화 하는 식상한 핑계다. 신선한 핑계거리를 찾으려는 성의조차 없는 지루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찾는 상황에서도 나이를 내세운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승진을 먼저 해야지. 나이가 많으니까 나부터 챙겨줘야지(특히 먹는 것) 나이가 많으니까 내 부탁을 들어줘야지.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내 의견을 따라야지. 나이가 많으니까 내가 더 받아야지. 내가 나이가 많은데 감히 나에게 대드냐, 내가 나이가 많은데.......! 라는 것은 이래저래 갖다 붙이면 바로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재갈같다. 그리고 ‘나이가 많으면’의 엄청난 특혜는 말을 함부로 하거나 무례해도 된다는 데에 있다. 나이가 많으면 다 괜칞다.
글로 쓰기도 지겨울 만큼 많은 사례를 목격하는 중이다. 여태 나의 공직생활 십년은 부끄럽지만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보다는 '저렇게는 절대 안되어야지.' 가 압도적으로 많다.
어제 버스에서 아주 낯설게도 상식적인 노인들을 목격했다. 돌돌이 장바구니가 사람이 많은 버스안에서 민폐긴 하지만 굳이 그걸 들고 버스를 타는 노인들을 보면
사실 못본 척했다. 솔직히 굳이 왜 저걸 들고 이시간에 버스를? 라는 생각도 했었다. __죄송하다..그렇지만..복잡한 버스안에 사람자리도 없는데 돌돌이 자리가 있다는게 샘이 난다고나 할까.
그분이 내릴 때가 되어 돌돌이를 챙겨서 내리는 문 쪽으로 가는데 '좀 지나갈게요'라고 하셨다. 내가 지나가야하니 너가 좀 비켜~!! 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돌돌이 때문에 미안하지만 조금 비켜줄 수 있겠어요? 라는 어조 였다.
또다른 내 앞에 노인은 자리 양보를 받았다가 내릴 때가 되었는지 움찔 움찔 했는데 딱봐도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가셔야 하는 분인데도 양보받은 자리가 너무나 미안하고 멋쩍은지 자리양보한 사람에게 어디어디에서 내리니까. 여기 와서 다시 앉으라는 말을 여러번 당부 했다. 그 앞에 서있는 내가 앉아버릴까봐 염려가 되었나보다. 나는 내앞에 자리가 나도 앉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잠깐. ...지금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지금까지 나의 경험으로는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각자 휴대폰만 보는거 아닌가. 말소리가 들린다면 그건 아마 싸우는 소리 였을 텐데..오늘 이버스는 모지? 갑자기 훈훈하고 따뜻했다. 낯설었다. 잠깐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역시 아직 세상은 살만해' 라는 휴먼 다큐멘터리같은 엔딩은 절대 없다.
버스에서 내렸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듣기도 낯뜨거운 욕설이 들린다. 분명 욕을 하는 사람이 있고 욕을 듣는 사람이 있을 텐데 하는 사람만 보이고 대상은 불분명하다. 혼자 세상에 대고 외치는 사람인가? 나는 내 길을 걸엇다. 등뒤에서 욕을 받는 대상의 욕지거리가 돌아왔다. 나는 좋은 구경이라면 놓칠 수 없으니 뒤를 돌아보았다. 같이 길을 건너는 상황인지 같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다툼이 있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욕을 들었던 대상이 저 앞으로 걸어가면서 욕으로 되받아쳤고 그것이 또 도화선이 되어 먼저 욕을 뱉은 중년 여성이 쫓아가서 그 대상의 머리채를 잡았나 어쨌나. 그 뒤 상황은 이미 횡단보도 저쪽으로 넘어 가기도 했고 나도 조금은 무섭고 이 심각한 상황을 약간 구경거리로 즐겼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냥 집으로 왔다.
사람이 많은 길거리에서 모두가 들리는 욕을 하는 사람이 천박해보이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감정의 맨바닥을 보여주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아직 감정을 통제하거나 표현하는 연습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떠나서 나는 그것을 '미성숙 했다'라고 표현한다.
버스에서 만난 상대를 배려하는 노인들의 태도와 횡단보도에서 만난 감정적인 중년여성들의 싸움으로 나는 약 10분만에 성숙과 미성숙한 태도를 경험하고 말았다.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모두가 같을 수 없지. 사람은 다 다르니까.' 마찬가지로 모두가 성숙한 어른이기를 기대할 수 없다. 최소한 그들을 거울 삼아 배울 점과 배우지 않아야할 점을 구별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으로 끊임없이 성숙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