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 수집 중
온동네가 뜨겁고 습기 가득한 한증막 같은 지 얼마나 오래 됐을까.
3개월만 지나면 춥다고 패딩 옷을 꺼내 입을 텐데 생각하면 지금 마구 땀을 흘리는게 조금 재밌기도 한데.
올해 처럼 아이스 음료와 스무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 건 처음이다.
지난 석달동안 나는 헤어지는 마음을 정리하고 새부서로 옮기고 몇몇의 남자들을 만나보면서 지냈다.
새부서 발령은 꽤 오랜만이라 낯설고 기대되고 무섭고 그랬다. 그래도 십년차니까 덜 긴장하기는 했어도 모르는 업무에 대한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니까. 다행히 직원들이 좋고 업무는 차차 배우면서 헤쳐나가면 된다.
맨땅에 헤딩하면 너무 아프겠다. 그치만 매번 이렇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꼭 해야할 일과 조금 미뤄도 되는 일, 그 중에서도 가장 급한 일 부터 처리한다. 조급하지 않고 천천히. 옆에 임용된지 6개월 된 아기 직원이 그래도 선배가 괜히 선배는 아니네요와 같은 비슷한 말을 했다. 시끄러운 내 마음 속과 달리 보기에 평온해보였나보다. 새부서에서 민폐는 아닌가 불안했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칭찬 한개 수집.
헤어지는 마음은 그의 짐을 내어주면서 마지막으로 마무리 했다. 아주 가느다랗게 남은 마지막 연결끈이었는데 나는 대충 흘려보냈다. 하고 싶은 말이 없기도 했고 있었다해도 이제는 의미가 없으니 굳이 예의 차린다고 얼굴을 보고 짐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내가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게 될까봐 그걸 보는 나나 그쪽이 미련이라고 오해할까봐 마주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이미 끝난 마당에 예의니 뭐니 누가 뭐라해도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집수니 내향인에게는 가장 어려운 숙제다. 마땅한 사람이 없는 것은 둘째로 하더라도 기회조차 거의 0에 수렴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비슷한 상황이겠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났는데 마침 그와 내가 비슷하게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나는 매주 주말마다 새로운 곳에 나를 노출시킬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미팅, 북클럽, 소셜다이닝....미팅에서는 내가 맘에 들고 나를 맘에 드는 사람이 일치할 확률 0. 다이닝 모임은 쑥쑥하게 밥만 먹고 왔다. 북클럽이 그나마 가장 재밌었는데 책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다. 몇몇의 모임을 거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사람들이 생각보다 아주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 있는 사람들은 누워있거나 술을 마시거나 육아에 지쳐있거나 셋 중 하나 인데 외부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꾸준히 하고 있는 운동이 하나 이상씩 있고 관심을 가지고 계발하고 싶은 분야가 각자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만큼 다양한 분야에 책을 가지고 나왔고 말은 또 다들 청산유수. 유감스럽게도 나와 매칭된 사람은 없었지만 사람들이 들고나온 책중에 아는 책이 많이 있어서 그동안 내가 책을 꽤 읽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미혼남녀의 시장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쯤에 있나?여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한달 내 경주에 같이 갈 수 있었던 남자후보 1,2,3번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이 사람들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나이 정보가 그래도 그들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정보라서 자꾸만 나이와 연관지어서 생각하게 된다.
우선 지금의 나는 멀쩡하게 직업있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어떤 상대와도 연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맞지않는 사람과 10년을 만난 후 생긴 자신감이다.
1번은 나이만큼 성숙했고 예의바르고 이야기도 지루하지 않았고 만나고 헤어진 뒤 또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락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두번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안가린다고 해놓고 아직 뭘 그렇게 가리나......나란사람.
2번은 나이에 비해 미성숙했고 뭘하든 서툴렀다. 서투름에 점점 더 어색하고 불편해져서 불편한 윗사람과 식사자리만큼 숨이 막혔다. 그냥 혼자 지내자 라는 생각을 했다.
3번은 나의 프로젝트 진행 중에 만난 가장 멀쩡한 사람이다. 성숙하고 차분하고 배려있는 행동이 돋보였다. 지금 나는 나에게 물만 따라줘도 감동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는 속도가 꽤 느린 편이다. 매일 성실하게 연락을 주고 받고 있지만 실시간 대화는 되지 않고 다음 만날 약속은 과연 정하기나 할까. 이런 속도에 불만은 없다. 마침 나도 업무 때문에 바빠서 바로바로 연락을 할 수 없고 퇴근하면 운동도 해야 하고 주말에는 영어스터디도 가야한다. 오히려 천천히 가까워지는 게 더 좋다. 하지만 그분이 나에게 가진 호감이 어느정도인지모르니까 내가 어디까지 해야하는지 모르는게 불안할 뿐이다.
요즘 영어스터디에서 'Crying in H Mart'라는 책을 읽고 있다. 혼혈인 주인공이 한국인 엄마를 암으로 잃고 음식으로 그녀를 기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질문 중에 각자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나에게 슬픔을 극복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가.. 나는 크게 감정이 동요하는 일이 많이 없어서 헤어졌을 때도, 오래 같이 일했던 부서직원들과 작별할 때도 울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나대로 일상을 잘 살아가려고 중심을 지키는 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에게 성숙하다고 했다. 칭찬이 기분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떨어진 당충전을 위해 쫄깃한 꽈배기 3개와 달콤한 코코넛커피스무디로 주말 일상을 채웠다.
결국 경주는 남자친구와 가지 못하지만 지치지 않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한다. 내가 결혼을 원하는 사람이었던가. 전남친이었기 때문에 결혼 생각을 안했던 걸까. 요즘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장기연애 이후는 결혼이라는 패턴을 몇번 봐버렸기 때문인가보다. 지금 나는 내 인생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고 평온한 상태라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위에 좋은소식들도 많이 생기고 있으니 나도 여기에 같이 묻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