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혼나는 꿈도 있나.
좋아하는 작가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엮은 시집을 샀다. 시집을 산 건 꽤 오랜만이다.
보지 않아도 제목에서 이미 반해버렸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사랑, 꿈은 같은 결인데 혼난다니..낯선 동사와 예쁜 명사의 조합. 그리고 과거형
무엇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치만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라니, 사랑해도 혼나는 꿈도 있나.
그 시인은 이 한줄을 읽자마자 '시를 좋아하시죠?'라고 물었다.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시는 다른 언어였다.
시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는 그들만 알 수있는 코드.
시라는 언어에서 배제되어버린 나는 그들의 언어를 알고 싶었다. 그 시집을 사는 건 당연한 일.
너무 소중해서 아껴읽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조그만 책이 바로 왔다.
나도 이제 그들의 언어에 발을 담가야지.
성인이 된 이후 지금 직장을 다니는 동안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다.
좋아하는 작가를 섭외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강연을 준비하는 일.
감히 그에게 돈을 줄테니 강연을 해달라라고 말하기엔 너무 세속적이어서 상당히 조심스러웠지만
덕분에 그와 메일을 주고받고 담당자로써 그를 배려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은 꽤나 기뻣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한다. 담백한 문체로 간결하게 위로해주는 그의 글은
그냥 툭던지는 것 같지만 상당한 시간 고민한 듯한 배려가 있다.
그리고 그는 어여쁜 것을 보는 시선과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생각을 엿보고 싶었다. 어떻게하면 그런 예쁜말을 만들어 낼 수 있나요?
언젠가 다른 강연에서 그는 이런 비슷한 질문에 거짓말이라는 답변을 했다.
그가 쓰는 모든 글이 진실은 아니라고.
누군가 에세이와 시가 어떤 점이 다른가요? 라고 물었다.
그의 산문은 시같기도 하고 어떤 시는 산문같기도 해서 그들 사이에 경계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는 질문이었다. 에세이는 진실이 기반이고 시는 거짓이 섞여있다고 했다.
거짓말을 그렇게 예쁜 말로 써놓는다면 나는 그 거짓말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의 글 앞에서 판단력을 잃는다. 그의 이야기 안에서는 어떤 것도 거짓이 아니다.
그의 강연을 듣고 남은 걸 생각해보자. 몇개 없어서 메모하지 않은 나자신을 자책했다.
- 안부를 묻는 사물을 만들기_ 내방에 있는 인형들에게 말을 걸어볼까한다.
마음속으로 그들은 이미 내 친구들이긴 했지만 말을 걸어본 적은 없다.
- 내방에 이름 짓기_ 그의 꿈방처럼 나도 내방을 부를 이름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빵을 만드니까 빵집?? 뭔가 범상치 않은 시적인 게 필요하다.
- 내 직업 찾기_ 하루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나의 직장이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닌 이런 괴리있는 현실에 안주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 시인도 직장생활을 하지만 하루에 십분 시를 쓰는데도 시인이라고 한 것 처럼 나도 한달에 한번 글을 쓰더라도 작가라고 할 수 있고, 한달에 한번 그림을 그려니까 화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걸까. 꼭 하나여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작가이면서 화가인 삶을 살아보겠다.
근데 집은 빵집인 또다른 괴리를 맞닥뜨리는 순간.
좀 더 기억해내고 싶다. 생각나면 더 적기로 하자.
상당히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고운 시어를 고민하느라 외부와 소통을 끊고 살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했었는데 정반대였다. 두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말을 했고 심지어 웃기기도 했다. 사람들을 웃게 하는 건 어려운 일 아닌가. 나는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강연장 내부가 소란스러워서 미안할 뿐이었다.
역시 그는 팬이 많았다. 강연장에 일찍 온 그를 보고 갑자기 강연을 들으신 분들도 계실 정도였다. 한권 한권 다 마음을 써서 사인을 해주셨다. 시인의 글씨체란.... 나의 시선에는 시인 필터가 있다.
나도 내가 가진 책 세권 다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그에게 무리한 부탁 같아서 한권만 받았다. 그리고 너무 감사하게도 담당자 특권이 하나 있었다. 그가 소장한 몇권 없는 책을 선물로 주신 것.
나의 십년 직장생활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그의 책들을 또 읽고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도 읽고 시어를 배운 다음 또 글을 쓰러 와야지. 나는 작가니까.
책장을 덮어도 자꾸 눈이 부시던 유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