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휴식
여행 중에 혹은 휴식 중에 시간은 역시 점프한다. 손바닥만한 방안에 손바닥만한 창문에 손바닥만한 암막커튼이 어찌나 효과적이었는지 열시반에 유카리랑 난바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10시 33분에 시계를 봐버렸다. 방안에 꽉찬 큰 화면으로 유튜브를 보는게 재밌어서 혹은 쉬는 날이 지나가는게 아쉬워서 어제 늦게 자긴 했지만 그래도 약속시간에 일어나는 건 서울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을 내가 오사카에서 해버렸다.
세수만하고 십분만에 튀어 나갔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유카리에게 너무너무 미안했다. 역 안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길이 엇갈릴까봐 유카리가 호텔로 와준다고 했다. 안그래도 미안한데 호텔로 와준 유카리가 커피도 사주고 열차표도 주었다. 어찌저찌 나라로 가는 열차에 탔다. 대학 시절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오래 시간을 같이보내는 날이었다. 혹시 대화거리가 부족할까봐 염려되었는데 다행히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좋았다. 대학 때 얘기도 하고 동창회하자는 계획도 세우고.
나라에 도착해서 바로 점심거리를 찾았다. 내가 살 생각으로 장어덮밥을 먹었다. 어제 유카리가 사기도 했고나는 장어덮밥이 먹고 싶었으니까. 진짜 내가 내야 했는데 유카리가 너무 단호해서 결국 양보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오면 진짜 내가 다 사줘야지.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사슴이 진짜 많이 있었다. 사슴이 자유롭게 길도 건너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는 광경이 생소했다. 엄청나게 큰 절에서 대불도 보고 향도 피우고 소원도 빌었다. 절 입장료 낼때가 되서야 처음으로 유카리가 내가 돈쓰는 걸 허락해주었다.그렇지만 시장에서 유카리가 떡도 사주고 커피도 사줘서 유카리가 훨씬 더 돈을 많이 썼는데 매번 실랑이를 길게 할 수 없어서 꼭 서울에 오라고 했다.
저녁으로는 스시를 사고 편의점에서 첫날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샀다. 오늘은 이만보 넘게 걸었다. 다리에 패치를 붙였더니 시원하고 덜 피로했다. 유튜브 보느라 가져온 책은 애써 못 본척하고 있다. 나란 사람…
결국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오전 시간을 여유있게 쓰고 싶어서 오후 비행기로 예약한건데 생각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찜했던 타마고산도 집이 하필 문 닫는 날이라서 호텔 근처 브런치집을 갔는데 역시 사람이 많았다. 결국 타마고산도가 있는 마침 보이는 카페에서 아쉽지만 커피와 타마고산도를 먹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난바에서 드물게 조용하고 재즈음악이 흐르는 곳이어서 만족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호텔에서 1분거리에 돈키호테 있다는 걸 알았다. 왜 나는 더 힘을 내서 쇼핑을 하지 못했나. 집에 가기 싫다고 비행기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필요한 것만 착착 담아서 쇼핑을 아주 밀도있게 끝냈다.덕분에 여유있게 잘 도착해서 카오리가 추천해준 과자도 사고 편의점에 가서 남은 동전도 털었다. 어제 유카리가 사준 떡도 먹었다.
공항에서 눈물로 헤어지는 연인을 목격해버려서 저런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다가 양손 무겁게 쇼핑백을 들고 있는 한국인들 가방에는 뭐가 들어있나 관찰하다가 그중에서도 시내 지하철에서부터 비행기 좌석까지 계속 마주치는 커플들을 보면서 지나간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하다가 서울로 와버렸다.
여행 내도록 읽지 못했던 책을 공항에서 대기 하는 중에 거의 다 읽었고 쉬다온 여행이었지만 피곤해진 몸으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반대로 타는 바람에 오히려 더 늦게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서울이라 더 정신을 못차렸네. 나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