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한번 마음속 느껴지는 감정들을 불쑥불쑥 꺼내서 편하게 펼쳐본 날들이 있었을까.더구나 그 상대가 자식이라면 한없이 조심스러운 것이 부모인데.그날의 대화는 참으로 억울하고 분하기 짝이 없었다.그리고 적나라한 민낯을 마주한 그런 날이었다.
사랑이는 이제 고2에 올라가는 기로에 서있다.
그런데 고1을 마무리하고 번아웃이 찾아왔다. 모든 의욕을 잃고 잠만 자기 시작했다. 그 공허하고 피곤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여행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간다고 할까. 매번 거절했던지라 혹시나 했는데 냉큼 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너도 참으로 힘들었지 싶었다.
주변에서는 이제 고2 올라가는 중요한 시기에 여행이냐며 의아해했다. 맞다 정작 당사자도 고민되기는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선택한 길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한결 편안한 표정과 가벼운 발걸음 그리고 맑은 웃음을 보고 있자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 곳이 쿵하고 찡했다.
모든 게 느릿느릿 둔한 것 같지만 자기만의 속도와 방식에 잘 맞지 않은 세상에 사느라 애쓴다.
더듬이가 한 200개는 되는 듯 생각이 많다 그래서 좀 더 예민한 건지도 모르겠다.
꿀 같은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다시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랑이는 나올 생각을 않는다. 아니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무슨 말을 건네야 될지 지금 어떤 말이 도움 되는 건가. 마냥 지켜보는 것이 맞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품고 지켜보던 중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내려앉았다. "놀라지 마세요."라고 운을 띄운다. 차라리 이 말을 하지 말지 듣기도 전에 심장이 널뛴다.
" 지난 1년 동안 학교 다니면서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남은 2년을 저는 이렇게 살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학교는 그만두고 싶어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지난 시간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 아까웠다. 사랑이 성적이 그리고 무엇보다 내 노력이 말이다. 참 우습지 않은가 엄마라는 사람이 지 노력나부랭이가 안타까울 일인가. 그런데 분명 그랬다. 그동안의 노력이 버려졌구나 싶어 울화가 치밀었다. 그 순간만큼은포기하기엔 아까운 사랑이 성적과 엄마로서의 수고가 훨씬 더 억울했던 것 같다. 본전 생각 안 날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니 본전 생각이 간절했다. 얼마나 눈치 보고 살얼음 깨지 않으려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돌아온 말은 결국 이거구나 싶었다.
"너에게 많은걸 바라지 않아. 물론 네가 바라는 성적이 아닐지 몰라도 지금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버릴 과목은 과감히 버리고 챙길 과목만 잘 챙겨가면 맞춰서 갈 수 있겠는데 왜 포기하려고 하니?"
"엄마, 저는 학교생활 자체가 힘들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1년 동안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거예요.그리고 지금은 제가 엄마 감정까지 돌아볼 힘이 없어요." 땅바닥에 누워 생떼 부리는 아이처럼 꼭 그렇게 떼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도 해줄 수 있는 말도 모든 게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만큼 마음에 힘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 앞에서 얼마 만에 눈물을 보였는지 모른다. 지도 아플 텐데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에 더 아프게 해서 미안했다. 하지만 맘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된장, 엄마 되기 참 힘들다. 정말 너도 징그럽게 힘들게 한다고 속으로 외쳐댔다.
며칠을 지내고,얼마나 힘들게 꺼낸 말이었을까. 내가 억울했던 것보다 천배 만배 더 슬펐겠지.
남들 멀쩡히 다닌 학교가 그렇게 다니기 힘들었을 때 너는 어땠을까.
부모 욕심으로 바라볼 때는 기껏 1년 다녔는데 번아웃이라니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부모를 놓고 그냥 한 사람으로 봤을 때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