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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 Jan 31. 2024

18년 만에 멋져 보였다. 남편이.

미친건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사랑이를 낳고 알았다.

'아, 이 남자랑 둘째까지 낳고 살다가는 제명에 못 살겠구나.' 하고 말이다.


도대체가 육아에 대한 개념은 전무했고. 항상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으로  함께 할 시간은 고사하고 술이 만취해 여기가 어디냐고 나에게 묻는 사람이었다. 정말 그땐 미친놈이라 생각했다. ^^

덕분에  출근하기 전 새벽부터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준비하다 보면 등이 땀으로 흥건 했고, 퇴근하고 오면 옷 갈아입는 시간도 숨이 찼다. 모든 육아와 집안일은 내 차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엉덩이는 어찌나 거운지 소파 거실과 한 몸이 되면 1박 2일 일어나질 않는다.  저런 게 다있나했다.


그런데 사랑이가 자라면서 동생을 강력히 원했고, 집에 있는 그 인간도 둘째를 낳으면 자기가 다 키우겠다고 개뻥을 쳤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몇 년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둘째를 갖기로 했고 그렇게 4 식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 등에는 자석이 달렸는지 한번 누우면 착붙이었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등꼴이 오싹하다.


우야무야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자라고 사랑이의 초등학교 졸업식날이 됐다.  한 80%쯤 진행되고 있을 때  부모님께  손 편지를 직접 읽어주는 시간이 있었다. 사랑이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려는 바로 순간 남편이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사랑이는 꺼낸 편지를 어찌할지 몰라 만지작 거리더니 읽기 시작했고 결국 남편은 낭독이 끝날 때까지 훌쩍였다. 먼저 선수 치는 바람에 뭉클했던 엄마는 울지도 못하고  그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더랬다.  오늘 같은 날 만큼은 엄마가 울 기회도 좀 주지. 매사에 눈물 많은 사람이 그런 날은 참 야속했었다.





첫째에게  유독 미안함과 애잔함이 있다. 처음으로 부모가 되어보는 우리도 미숙했기에 실수하고 우왕좌왕했던 그리고 아직도 갈피 못 잡는 부모라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고등학생이 된 사랑이가 얼마 전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남편은 사랑이의 모든 말을 듣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질문은 했지만 끝까지 말을 다 들어주더란 말이다. 울지도 않고서. 그리고 그만두지 않았을 때의 힘든 점과 그만두었을 때의 힘든 점들에 대해 분히 말을 이어갔다. 또한 그에 따른 책임은 어떻게 질 건지 물었다. 마지막으로  "그래도 네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자퇴서 받아와. 사인해 줄게"라고 한다.  


사랑이와 말해보라고 한건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대화가 끝나고 가서 조용히 물었다. "그게 진심이야?"

"본인 문제는 본인이 가장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해. 많이 고민하고 하는 말일 거야. 정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18년 살면서 저렇게 차분한 모습은 또한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 감정에 공감능력이 떨어져 AI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럴 때 나처럼 감정이 먼저 마중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건지 결혼 18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이 멋져 보였다.


어쩌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 일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 감정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훨씬 어려운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적인 여자는 그동안 실컷 표출하면서 살았다. 덕분에 감정을 정제하는 남자를 괴롭혀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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