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손흥민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손웅정씨 교육법에 대한 생각

by 도도대디

최근 손흥민 아버지 손웅정 씨의 교육 방법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피해자가 보상금을 위한 협박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법정에서 가려질 문제이고 분명한 것은 체벌과 강압적인 교육이 이뤄졌다는 것은 사실임을 전제로 씁니다. 이 글은 손웅정 씨가 계속적으로 언급해 왔던 강인한 교육법에 대한 글입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니 훨씬 전부터 손웅정 씨의 교육법처럼 아이를 강인하게 키위 위해 적절한 정도의 체벌과 강압은 어쩔 수 없다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크게 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시련은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언뜻 맞는 말 같아 보이나 이는 정말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폭력으로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없습니다. 설령 겉으로 보기에 성취 같아 보일 수는 있으나 그 개인의 인생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압과 폭력은 인내심을 키워주기보다는 우리 아이에게 잊지 못할 상처만을 남길 뿐입니다. 폭력으로 잡힌 규율은 눈치 보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손웅정씨의 체벌에 대한 기사에 대한 댓글들이 우리가 강압적 교육을 어떻게 생각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면 그만둬야 한다고 말합니다. 폭력은 무조건 잘 못한거라면서도 맞을만 했다고 말합니다.


맞아가면서 배워야 할 가치나 성취는 없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배우는데 그 배우는 과정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만약 체벌의 주체가 손흥민의 아버지가 아니라 일반 축구 코치였다면 이런 반응은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과정은 무시한 대중들의 맹목적인 결과 지상주의에 말문이 막힙니다. 만약 손웅정 씨의 교육철학이 맞는다면 손웅정 씨 본인이 최고가 되었어야 합니다. 아니면 손흥민의 형이나 그와 관련 있는 후배, 제자들 중에 누군가는 제2의 손흥민이 되었어야 합니다.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요, 정말 최고의 지도자라면 선수의 몸까지 잘 돌봤을 겁니다.


만약 손아카데미에서 훌륭한 선수가 나온다면 그것은 지도에서의 차별성이라기보다는 손아카데미가 그 명성으로 이미 우수한 예비 축구 선수들을 가려 뽑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 손 아카데미는 지원자가 넘쳐나 테스트를 보고 가능성 있는 선수만을 뽑고 있습니다)


손흥민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을 겁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뛰어난 유전자를 타고났을 겁니다. 유전자 이야기를 다른 글에서 했지만 이 유전자가 없는 누군가에게 손웅정 씨의 교육법은 절대 통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근성이 부족하거나, 간절함이 떨어지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유전자가 없는 그 학생을 더욱 압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편으로는 맞는 말 같지만 어느 한 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근성만 가지고 모든 걸 헤쳐나갈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출발선은 다르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은 다르고 누구나 성장 환경은 다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요소들 또한 맞춰 돌아가야 누군가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복잡한 성공의 과정을 단 하나, 근성이라는 이름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울대 보낸 부모의 교육법’, ‘하버드 보낸 부모의 교육법’ 같은 책들을 봅니다. 과연 그 교육법이 모두에게 적용이 될까요?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중요하다는 씁쓸한 말들도 있지만(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집안도 부족하지 않아 학원도 잘 보냈고, 공부 유전자도 타고났어야 하는 등, 개인의 역량과 사회적 환경이 잘 맞아떨어졌기에 좋은 결과를 냈을 뿐입니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낸 노하우는 분명 있겠지만 모두에게 통하지 않다는 상식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러고는 모든 원인을 학생에게 돌려버립니다


근성과 끈기라는 말로 말이죠.


또한 그 근성이라는 것 역시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그러한 마음먹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노력의 유전자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도 부모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회적인 요소로 간절함이 배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이 역시 사회적 요인이 작용을 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윽박지르고 무섭게 한다고 해서 없던 근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슛 1000번을 찰 때까지 물 마시는 것은 금지라거나, 실수할 때마다 얼차려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능력이 크지 않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선생의, 코치의, 감독의 권위라는 것은 근엄하고, 무섭고, 윽박지르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강하게 키워야 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논리로 아이를 겁박하면 우리 아이의 정서는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게 마련입니다.


부모가 선생이, 코치가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하고 전력을 다해서 자식을, 제자를 사랑하고 위해줄 때 권위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겁니다. 물론 다 맞춰주고 원하는 것은 다 해주라는 말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손웅정 씨의 교육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손흥민이라는 훌륭한 선수를 키워낸 데는 그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고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권위를 세우기 위해, 학생들에게 간절함과 근성을 키우기 위해 폭력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이란 것은 단순히 신체나 도구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일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위협하고 협박하고 무섭게 하는 모든 행위가 포함됩니다.


동시에 박지성의 기사도 퍼지고 있더군요.

박지성 기사 읽으러 가기


학생 시절 맞지 않고 축구를 했더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이죠.


폭력과 억압은 우리 아이들을 주눅 들게 만들 뿐입니다. 거기에 근성과 노력은 없습니다. 당연히 창의성은 말살됩니다.


손웅정 씨는 인터뷰에서 체벌과 폭압을 의식한 듯, “지도자로서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언행과 행동은 없었다"라고 밝혔습니다. ‘폭력적인 언행은 없었다’가 아니라 말이죠. 하지만 부모도 체벌과 욕설을 하며 늘 사랑을 전제로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사랑이 전제로 되어 있었다면,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폭력적인 언행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서, 미래의 자녀를 위한다고 해서

“x새끼야, xx놈아~!” 같은 말이 용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매'는 말도 안 되는 x소리입니다. 그냥 잘 못해서,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때렸다고 하는 편이 솔직합니다. 사랑과 폭력은 기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체벌과 육체적 폭력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덧, 손웅정 씨의 기본을 강조하는 교육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손흥민 축구클럽은 잘하는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테스트로 뽑아 다른 유소년 클럽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잘 가르친다고 합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을 손웅정 씨도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손웅정 씨는 "시대의 변화와 법에서 정하는 기준을 캐치하지 못하고 제 방식대로만 아이들을 지도한 점 반성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스스로의 교육법에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체육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아직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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